2013년 4월 10일 수요일

어둠의 왼손- 현실을 비추는 허구








서지 정보
제목
어둠이 왼손
저자/역자
어슐러 르 귄/ 서정록
출판사
시공사
출간일
2002.09.09
페이지
384p
판형
148*210
가격
9,500





SF라는 장르

한국에서 sf는 소위 말하는 장르 문학중에서도 인기가 없는 편에 속한다. 일부 매니아들은 열광하지만 대부분의 독자가 손사래를 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sf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편이다. 첫만남은 과학독후감대회라는 명목으로 국민학교 때 강매 당한, 만듦새가 조잡한 책이었고 이후로도 필립k딕의 몇몇 단편선을 읽은 게 전부다. 코니 윌리스의 소설을 읽으며 차오르는 이유 모를 짜증을 참다 못하고 던져버린 이후로 sf는 손을 떼었다. 만일 Sf로 분류할 수 있다면 커트 보네거트와 더글라스 아담스정도가 추가될 수 있을까.

커트 보네거트는 스스로가 sf작가로 규정되는데 대한 유머 섞인 푸념을 늘어놓은 일이 있다. 본인은 진지한 작가로 인식되고 인정받고 싶은데 sf작가라는 분류가 일종의 낙인이 된다는 소리다. (덕분에 sf팬들에게 푸짐한 원망을 들었다고 한다.) 이 일화로 미루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sf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은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어둠의 왼손>의 백미는 서문이다. 그녀는 서문을 통해 sf에 대한 선입견과 sf 스스로가 굳어가려는 어떤 경향성에 대해 경계한다. 그녀는 sf작가는 예언자나 과학자가 아니라 그저 현재 세계를 기술하고, 허구를 통해 그를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파멸과 같은 멸망적인 극단으로 치달아 미래를 예언하는듯한 sf, 그리고 이로 인해 sf가 일종의 미래 예언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비판한다. 소설가의 임무는 예언이 아니라 허구와 거짓말이며, 소설가는 현재를 기술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은유로서의 허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양성 또는 무성, 게센인

이 소설은 헤인 세계관 연작 중의 일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지구를 포함한 여러 별들이 동맹을 맺고 은하간 여행이 가능해진 시대의 이야기이다. 헤인 인들의 행성간 동맹인 에큐멘의 사절인 엔보이(사신) ‘겐리 아이겨울 별 게센에 파견된다. 헤인 인들은 은하의 새로운 별을 발견하면 미리 조사대를 파견하여 그곳의 환경과 생활상, 문화들을 파악하고, 이후 사신을 보내 평화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엔보이가 파견된 게센은 겨울별로 매우 추운 환경이고, 두 강대국인 카르하이드와 오르고린은 각각 왕정제와 평의회 과두제 국가이다. 이곳의 문화나 관습들은 소설중에 자연스럽게 묘사되며5개의 챕터를 할애하여 민담이나 조사보고서를 통해 더 심도 있게 보여준다. 추운 지방이라는 특성에서 나온 여러 생활상들이 있고, 그들의 독특한 문화인 시프그레서가 존재한다. 시프그레서는 위신, 체면, 지위, 자존심..등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원칙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양성인이라는 점이다.

날 때부터 성이 구분된 지구의 인간과 다르게 그들은 무성인 채로 태어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발정기인 케머기에는 남성 또는 여성 어느 한 쪽의 성이 발현되어 육체적인 변성이 되고, 그 파트너는 그에 반응하여 반대쪽 성이 발현되어 짝짓기를 하는 것이다. 케머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무성으로 돌아오며, 여성의 역할이었던 쪽은 임신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성적인 특질이 게센인의 많은 면들에 영향을 미치며 작중에서도 이에 대한 감상이나 묘사에 많은 부분이 할애된다.

르귄이 보여주는 이 양성 사회는 곧바로 우리 인류 자신의 사회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성적 긴장이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을까? 우리에겐 너무 당연히 느껴지는 어떤 것들이 생각 해보면 단성인의 특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양성사회는 기본적으로 단성사회보다 성적인 금기가 적은 사회이며 경쟁이 적은 사회이다. 분규나 소규모 전투는 있어도 대규모 전쟁이라는 것은 없다. 물론 르귄은 양성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신분제도, 독재, 음모, 정치적인 모략과 파벌이 있다. 다만 르귄은 그녀가 고안한 이 양성세계라는 상상게임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사회를 다시 돌아보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추방자 에스트라벤

주인공인 엔보이는 동맹을 위한 사절로 게센에 온 이방인이며,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중심인물인 에스트라벤(세렘)은 속한 곳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인물이다. 외부로부터 온 타자와, 외부로 쫓겨나 타자가 되는 자. 세렘은 엔보이의 조력자이지만 엔보이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렘은 모함으로 인해 카르하이드에서 추방 당해 오르고린으로 도망치고, 엔보이 역시 카르하이드가 동맹을 받아들이지 않자 오르고린으로 향한다. 하지만 오르고린의 정치적 상황은 엔보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고, 엔보이는 수용소에 갇히고 만다.

먼 우주에서 왔다는 빛의 사신 엔보이는 완전히 미덥지는 않지만 게센의 정세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키르하이드에서 그는 정권을 잡으려는 섭정에 밀려나고, 오르고린에서는 그를 이용하여 권세를 잡으려는 세력이 있지만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오르고린으로 추방된 세렘은 수용소에 있는 엔보이를 구해 함께 도망친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북 쪽, 눈과 얼음의 세계를 통해 그를 다시 카르하이드로 데려다주려는 것이다. 이 긴 여행을 통해 둘은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된다. 갖은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세렘은 게센과 헤인의 동맹을 성립시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세렘은 숭고한 희생을 택했고, 그로 인해 게센은 동맹을 선택하게 된다. 작품의 시작부분에는 게센의 의식이 나오는데, 다리()아치 건설시, 그 쐐기석 틈새에 모르타르를 칠하는 풍습이다. 이는 양안을 잘 연결하라는 의미에서 사람 희생양의 피와 뼈를 넣던 의식이 변형 된 것이다. 결국 세렘은 게센과 헤인간의 다리 가운데 놓이는 제물을 택한 것이다.

중간에 삽입되는 눈보라 속에서반역자 에스트라벤은 세렘의 삶과 닮아있는 이야기이다. 세렘은 형제간의 케머에 대한 규약을 어겨 가족 영지에서 추방 당하고, 반역의 오명을 쓰고 본국에서도 추방 당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 추구하는 것은 사랑과 이웃과의 (오르고린/헤센) 평화였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키르하이드와 폐하를 위해 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제가 봉사하는 주인을 위해 일했습니다. “

아르가벤 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주인이란 에큐멘을 말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인류입니다.”...



빛은 어둠의 왼손

제목 어둠의 왼손은 빛을 가리킨다. 르귀은 동양 사상에 관심이 많은걸로 보이는데, 작중에 계속 등장하는 것은 서구사회적 이분법과 대비되는 동양적인 음양의 이미지이다.

게센인들의 성 자체가 이분되지 않으며, 그로 인해 그들의 사상과 문화가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연인처럼
함께 누워있다.
마주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결국 르귄이 상상으로 만든 이 세계는 양성이라는 특질에 의해 이분법적인 사고와 반대되는 조화와 음양의 세계이다. 양면성과 조화, 타자간의 만남과 이해, 이 책을 읽은 후에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상상게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