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촛불집회, 고 노무현 대통령 노제, FTA반대집회.. 성난 민심이 거리로 모여들 때면 흔히 들을 수 있던 노래. 과연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우리 체제를 규정할 때 쓰는 민주주의란 과연 교과서에 기재시에 반드시 앞에 ‘자유’를 넣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그것인가? 아니면 북조선의 사회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일까? 또는 신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선결조건에 불과한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국민의 힘으로 쟁취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완벽하게 성취했는가? 삶터에서 불타죽은 이들이 테러리스트취급을 받고 유족들이 잡혀가는 나라, 노동운동이 범죄시 되고 무단해고당한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이 줄을 잇고,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한 여성이 35m의 타워크레인에서 1년에 가까운 시간을 외로이 투쟁해야 하는 나라. 이러한 나라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걸까?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보통선거권’으로 요약되는, ‘대표자를 뽑을 권리’에 집약되어있을 터이다. 바로 ‘가장 현실적인 민주주의 모델’이라고 배워온 ‘대의민주주의 모델’이다. 대의제에 대한 회의와 그에 대한 반론은 계속 있어왔지만,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시민에게 있어서 아마 대의제의 대안인 직접민주주의는 순진한 몽상 정도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근자에는 몇몇 고명한 정치학자들이 대의민주제를 옹호하는 책자가 무려 대한민국국회의 지원으로 출판되기도 한 모양이다.) 물론 모든 안건과 법제정에 국민이 참여하는 식의 직접민주제는 실현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정보화사회가 발달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안건을 인터넷을 개개의 시들이 투표로 결정하는 것은 아직도 물리적으로 어렵다. 게다가 투표율에 대한 우려와 그로 인한 대표성의 문제도 불거지며, 각 이슈에 대해 충분한 정보와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전문성의 우려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대의제 또한 문제점이 없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19대 총선 후, 목하의 우리들.
사실 이 책 <누가 아렌트..>는 19대 총선 열흘 전쯤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2008년, 이명박정부 집권 후 그해 여름 그러니까 촛불집회 이후 바로 출판된 책이니, 사실 이미 4년이나 묵은 책이다. 하지만 총선을 앞둔 그 열병과 축제 사이의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이 책을 읽으며 어렴풋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들 민주시민들은 먹고살기 힘들고, 바쁘고, 모였다 흩어지고, 지지하다 실망하고, 비난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에는 정치인들, 행정가들, 관료들, 몇몇 유명인들이 있고, 그들의 말 한마디, 트위터가 ‘정치적 관심거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또는 백수짓을 하거나) 우리들 민주시민이 민주주의의 주역 역할을 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이명박 집권 이후 ‘정치’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은 확실히 늘어났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담론은 여전히 정치엘리트들의 영역을 바라보는 소시민의 시선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SNS로 정치인과 대화를 나눈다고 정말로 그 정치인과 소통중인 걸까?
대의제의 과두제화 이외에도 짚고 넘어갈 점이 있었다. 물론 결과가 나온 사후적 이야기지만.(나는 나 혼자 총선 전에 이런 점이 걸렸었다고 총선후에 구라칠만한 뻔뻔함이 없다) 총선 전 범야권, 상징자본을 가진 지지세력, 그리고 지지자들까지,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많이 외친 구호는 ‘경제민주화’였다. 무려 ‘박독재 딸’당까지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웃어야할지 망설여지는 분위기였지만, 경제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세상 좋아지는 소리로 들리던 순간이긴 했다. 하지만 총선 결과표를 보면서 느끼는 씁쓸함에는, 애매한 정권심판론과 경제민주화라는 구호가 과연 얼마나 이해되고 먹혔는지를 곱씹게 만들었다.
경제민주화의 공약 자체가 오판이었다거나 총선 전략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째서 이렇게 왜곡되고 굴절되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권에서는, 경제 민주화만큼, '민주주의 다시부르기'에도 힘을 더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고 해서 총선 결과가 바뀌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선거판에서 정치공학적으로만 대응하는 정당들이야말로 이념과 좌우를 막론하고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배꼽잡는 민주주의,'parks and recreation'
재미는 물론이고 새로운 형식적 실험으로 큰 인기를 얻은 미드 'the Office'. 이건 봐야해. 내가 드라마 중 다섯 손가락, 시트콤 중 첫 손가락에 뽑는 작품이다. 사랑해요 마점장. (그리고 굿바이 마점장) 이번 시즌 마점장이 떠나가면서 참 아쉬웠다.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마점장 없는 오피스는 뭔가 공허하다. 재미는 여전히 있지만 전체적으로 힘이 빠지고 빛바랜 느낌. 그런데 웬걸, 오피스의 제작진이 새로운 시트콤을 제작하느라 이번시즌 오피스에서 하나 둘 빠져나갔고, 이미 그 새 시트콤은 시즌4를 방영중이라니?
뒤늦게 소식을 들은 시트콤은 'parks and recreation' . 오피스 제작진이 선물하는 본격 공무원 코미디이다. 인디애나의 포니시라는 가상의 도시의 공원휴양부서의 공무원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자치행정부서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면 언뜻언뜻 풀뿌리 민주주의의 속살이 드러나곤 한다. 시트콤의 이야기이니 대부분 과장되거나 허황된 설정들이겠지만, 주민의 의견이 나뉠 때 여는 공청회라던지, 지역방송에 나와 토론을 통해 정책을 설명하고 주민을 설득한다던지 하는 부분들이 계속 등장한다. 특히 주인공인 레슬리 노프는 과도한 열정과 공명심이 흠이긴 하지만 민주주의적 정신과 주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의 본분을 잊지 않는 캐릭터이다. 늘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고 등장인물의 독특한 캐릭터를 강조하며 웃음으로 끝나고, 론 스완슨같은 자유방임주의자도 나오지만 이 시트콤을 이끌어가는 거대한 축은 민주적 제도와 민주적 정신이다. 공청회에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신자부터 동네의 부랑자까지 모든 얼간이들이 바보같은 얘기를 늘어놓고 부서의 최고책임자인 론은 정부를 혐오하는 자유바임주의자로 나오지만, 의견들이 토론되고 각자의 정치적 사고가 존중되는 토양자체가 건전한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누가 아렌트..>를 읽으며, 특히 토크빌을 읽으며 이 드라마가 떠오른 것은 과장되고 희화화된 시트콤임에도 분명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미국의 민주주의의 현재가 언뜻언뜻 비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토크빌과 민주주의
토크빌은 프랑스의 귀족출신 법조인으로,프랑스혁명 후 당시의 프랑스 분위기에 염증과 환멸을 느껴 미국의 교도소 시찰을 핑계로 미국을 다녀온 뒤 <미국의 민주주의>를 써냈다.
저자가 미리 강조하는 것은, 토크빌이 말하는 미국이 당시 미국의 현상과 꼭 같지는 않았고, 토크빌이 어느 정도 미화시킨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의 잠재적 독자인 프랑스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으므로 의도적으로 그의 '마사지'가 들어간 것이리라.
토크빌에게 민주주의란 필요하면서도 섬세하게 조정하고 숙고해야 하는 것이었고, 당시 프랑스에서는 왜곡된 형태의 민주주의가 발현중이라고 보았다. 반면 미국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참된 민주주의가 가능했고, 그를 분석한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이다. 토크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것은 자유와 평등의 균형이었다. 귀족제와 왕정을 붕괴시키고 탄생한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평등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다. 하지만 자유 없는 평등은 전제주의로 타락 할 우려가 있다. 토크빌은 이러한 전제정이 프랑스(곧,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보며, 그 대안은 평등과 자유가 조화를 이룬 미국 민주주의라고 보았다.
" 국가 수뇌들은 그런 혁명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고 혁명은 그들의 동의도 없는 채...진전됐다. 프랑스 국민들 가운데 가장 권력 있고 가장 현명하며 가장 도덕적인 계층들이 그혁명을 교도하기 위하여 그것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결국 그 야성적인 본능에 내맡겨졌으며,....민주주의가 갑자기 권력을 획득했을 때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변덕에 비굴하게 복종했다. 민주주의는 힘의 우상으로서 떠받들여졌으며, 또한 좀 뒤에 민주주의가 그 자체의 과오 때문에 약화되자 입법자는 민주주의를 교도하고 그 악폐를 시정하는 대신에 경솔하게도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민주주의 혁명은 그것을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법,사상, 관습, 모럴의 동시적인 변화를 수반하지 못한 채 사회의 본체 속에서 진행됐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는 그 악폐를 더욱 줄이고 그 천부의 장점을 더욱 이끌어낼 대상인 것이다. " <미국의 민주주의 >
프랑스 민주주의에 대한 토크빌의 이러한 진단을 저자인 박홍규는 해방 후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단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쓰고 있다. 어찌 반박하랴, 나도 그렇게 느끼는데. 토크빌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극복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친절하게 토크빌의 기본개념을 설명하고, 이후에 토크빌의 민주주의의 3요인을 고찰한다. 서평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강이나마 나열하고자 하는것은 이것이 꿀보다 좋은 공부라고 믿기 때문이다.
1> 토크빌의 기본 개념
1)'상태의 평등' (Equallity of condition)
평등은 민주주의의 가장 근간이 되는 가치이다. 상태의 평등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조건의 평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물론 후자의 경우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으로 사용될 여지가 많을 것이다. 토크빌은 귀족제와 대비하여 민주주의의 평등이란 신분적 평등 뿐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문화 전반의 평등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자유와 자치를 낳는 여러 요인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사회상태의 전반적 평등함이 사회의 모든과정에 영향력을 미쳐 법, 여론, 당국, 주민에게 부여하는 독특한 경향과 모랄을 부여하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평등이야말로 'manifeste destinée'라고 보았다. 군주제와 신분제도는 어차피 무너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평등은 혼란만을 초래할 수 있다. (혁명 후의 프랑스도 그랬듯이.) 그러므로 미국과 같이, 새로운 평등사회에 걸맞는 민주주의 교육과 새로운 정치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2)민주주의의 요인.
자연환경, 결사와 자치, 민주적 모럴의 세가지로 이는 뒤에 각각 자세히 다루게 된다.
3)사회상태
사회상태는 법의 결과이면서, 그것이 일단 성립되면 다시 법과 모럴 및 사상의 원천이 된다. 저자는 가상의 자연상태나 인간 본성으로부터 논리를 끌어나가는 기존 학자에 비해 토크빌이 뛰어난 점이 바로 이 인과론적 사회상태를 강조하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4)모럴
"생활태도, 마음의 습관, 통용되는 여러 개념과 견해,심성을 구성하는 사상의 총체" "한 국민의 윤리적/지적 전체 조건"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도덕적/지적 특성"
이와같은 원래의 의미상 기존에 관습이라고 번역되던 'mores'를 저자는 모럴로 표기한다.
토크빌은 모럴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요건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민주제의 지속에 그 나라의 지리적 위치와 법이 미치는 영향이 과장되어 왔으며 모럴의 중요성은 무시되어왔다. 이에 반해 미국에서는 모럴,자연환경,법의 순서로 중요도가 매겨진다.
"아무리 유리한 자연환경과 훌륭한 법이 있다고 해도 그 나라의 모럴이 알맞지 않으면 어떤 제도도 유지될 수 없다...모럴의 중요성은 공통적인 진실로서...이 책의 관찰분야에서 핵심이 되으로서 내가 가장 궁극적으로 탐구할 종착역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토크빌은 미국에서는 인민주권 원리에 의거한 마을 분권이, 프랑스에서는 중앙집권이 모럴화 되었다고 본다. 중앙집권적 모럴은 구체제 하에서는 행정적 전제를, 혁명 후에는 민주적 전제를 초래했다.
"국민들에게 경험을 제공하고 그들이 더 잘 통치하는 데 필요한 감정들을 불어넣는 일은 훨씬 어렵다. 민주정치가 지향하는 바는 변덕스럽고 그 법은 불완전하며 통치도구도 엉성하자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조만간 민주정 통치와 일인정 통치 사이에 알맞은 중간가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발적으로 후자에 복속되기보다는 전자 쪽으로 차라리 향해야 하지 않을까? " <미국의 민주주의>
5)자유
토크빌은 위에서 말 했듯이 평등이 중요한 가치이지만 평등이 과도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자유 없는 평등은 민주적 전제를 낳는다고 우려한 것이다. 그는 마을자치를 '자유 제도의 풍성한 씨앗', '자유의 생명이자 그 원천' 이라고 본다. 마을자치에서 비롯되는 공적 자유, 정치적 자유가 바로 자유인 것이다. 토크빌이 본 혁명 10년 후의 프랑스는 "혁명이 전복시킨 정부보다 더 강력하고 절대적이 된 정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집중시켰으며, 자유를 억압하고 대신 허상 -정보도 토론 기회도 선택권도 갖지 못한 유권자의 투표를 인민주권이라 부르고, 침묵과 순종에 길들여진 다중의 동의를 과세에 대한 자유투표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가득 채우게 된" 상태이다. 이거 21세기 대한민국 얘기 아니다. 토크빌 예언가 아니다. 그런데 맞아떨어지니 참 신기한거지.
토크빌은 압제 밑에서 갖게 되는 자유나 독립에 대한 애호나 물질적 이득에 대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본다. "신과 법을 빼고는 그 누구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숨쉬는 기쁨"이며, "자유에서 자유 그 자체 이외의 무언가를 찾는 사람은 오직 하인 노릇에 적합할 따름"이라고 본다. 그는 "변호사이건 농부이건 병사이건 누구든간에 자기의 직업이 제기하는 사소한 관심 이외에는 전혀 무관심한 인간들을 미워"했다. 토크빌의 자유란 중상주의자들의 자유도, 참정권이라는 이름의 투표의 자유도 아닌 직접민주주의 차원의 정치적 권리였던 것이다.
6)자유와 평등
토크빌은 민주사회의 국민들은 자유를 본능적으로 사랑하나 그들의 참된 우상은 평등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평등사회에서 자유를 지키려면 단결해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결사이다. 결사는 평등한 사회가 노예상태의 평등화로 갈 것인지, 자유로운 평등화로 갈 것인지를 구분하는 요소이다.
2>민주주의의 3요인
1)제1요인 - 자연환경
토크빌은 미국의 자연환경이 민주정치 유지에 기여하는 우연적 또는 섭리적 원인이라고 본다. 마국은 이웃에 강대국이 없어 전쟁 우려가 적으며 높은 세금부담과 국방비 지출도 필요하지 않다. (물론 지금과는 다른 얘기다. 지금은 천조국 아닌가.시기와 상화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넓은 대륙에서 미국인들은 평등하게 시작했다. 다만 천혜의 부와 흑백 인종갈등이 훗날 계급갈등과 인종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예견하였다.
2)제2요인 - 법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사회계약에 다라 평등하게 시작했고, 마을자치, 연방제, 사법제도등의 법적 요소가 민주제 유지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법의 중심에 있는 철학이 인민주권의 사상이었다. 또한 중요한 것이 마을자치를 통한 직접민주주의이다. 미국 특유의 연방제는 중앙정부가 모든 권한을 휘두르는 것을 막고 각 주의 자치권이 인정되어 참여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다.
이러한 분권화는 행정적 효과 뿐 아니라 정치적 효과도 있다. 조국이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느껴지는 친근한 것이 된다. 마을자치는 이기주의를 이용해 주, 즉 공동체에 헌신하게 만든다. 이기주의를 그저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사적 정체성과 공적 정체성을 연결시켜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또한 토크빌 뿐 아니라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으로 재판자치제라 할 수 있는 배심제가 있다. 배심은 민주주의의 법정신 학교이며, 이를 통해 민주적 모럴을 더욱 배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인 박홍규는 한국에 배심제가 도입도는데 노력을 많이 기울이신 분이다.)
또한 중요한 것이 결사인데, 기성 질서로부터 독립성을 갖는 사적인 결사를 통해 공동체정신을 배우고 이는 민주주의의 형성과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3)제3요인 -모럴
토크빌은 민주주의에 영향을 끼치는 모럴로 종교, 교육, 셩험, 사고방식, 문화, 인간관계, 생활태도 등 다양한 요소를 들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종교를 강조하여 소개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한국교회와 그 신도들의 파렴치한 행태야 두말할 것 없으니 넘어가자.
"제도나 모럴, 가훈이나 계급상의 견해, 그리고 국민적 편견의 속박으로부터 탈피하는 것, 전통을 단지 하나의 정보의 수단으로만 받아들이며 현존하는 여러 현실을 단지 다른 방식으로 더 좋게 하는 데 참고할 교훈으로서만 받아들이는 것, 수단이나 방법에 구애됨 없이 결과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형식을 통해서 결과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토크빌이 말하는 미국의 철학적 사고방식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실용주의와는 조금 다르고, 토크빌은 미국인은 데카르트를 잘 모르지만 데카르트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이 사고를 규정하는 여러 선입견을 배제하고 수단과 형식보다는 그 내부에 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이성에만 호소하녀 모든 것을 회의하려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통도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 이것이 '민주적 인간의 전형'인 것이다.
이상이 토크빌에 대한 저자의 요약을 내가 또 요약한 내용이다.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완벽하다고 보지도 않았으며 미국의 민주주의가 완벽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토크빌이 당시 미국의 실상을 잘못 알았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가 크게 미화한 부분도 없으며 특히 그는 당시 미국의 문제점도 지적했었다. 물론 이 책을 읽고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논하는 나도 그렇다. 미국도 문제점이 많은 나라고 아마 토크빌과 관련된 얘기를 하는 누구도 그것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현대 미국이 토크빌이 본 당시의 미국과 달라진 점도 많을 것이다. 현재의 미국은 정치는 양당제로 수렴되어버렸고, 부의 양극화는 극심하며, 9.11 이후 많은 민주적 가치가 국가안보라는 단어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들은 건국을 포함해서 계속 지구 곳곳을 침략해왔고, 2차대전 이후 제국으로서 군림했다. 마이클 무어의 책이나, 브루스 레빈이라는 운동가가 쓴 <깨어나라, 일어나라>라는 책을 봐도 그렇다. 미국은 이익집단과 거대기업에 포섭되어있으며 신자유주의 광풍은 그들도 막지 못했다. 하지만 토크빌과 더불어 미국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미국을 향한 나이브한 선망도 아니고 미국을 배우자는 단순한 구호도 아니다. 토크빌이 당시 미국에서 발견하고 그 안에서 고뇌와 사유를 통해 곱씹어 낸 명저에서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소중한 생각들을 취하자는 것이며, 아무리 망가졌어도 현재 우리보다 나은 부분이 있는 미국 민주주의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를 살피자는 것이다.
앞서 말한 미드의 장면들처럼, 미국은 아직도 토론과 의견에 대한 존중이 살아있고, 연대와 공동체 정신도 있다. 그들이 늘 영화에서 거들먹대며 말하는 말하는 조국은 지금 우리에겐 역겹게 들리지만, 우리도 사적 정체성과 공적 정체성을 조화시킬 수단을 찾자는 것이다.
토크빌은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점으로 개인주의, 민주적 전제 등을 들었는데 모두 우리 사회에 그대로 나타난 것으로 보여 서글픈 마음이다.
- 아렌트, 이~뻐!
표지를보면 20대쯤으로 보이는 토크빌의 초상화와 만년의 아렌트의 사진이 음화로 드러나 있다. 근데 토크빌이 더 예뻐! 하지만 하이데거도 홀렸다는 아렌트인데...본문 자료사진 중에 젊은시절 아렌트가 나오는데..이~뻐! 내 스타일이야!
이 미녀의 삶은 기구했다고 한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나치독일에서 살다가 겨우 망명하고, 미국에 정착해서 대 학자가 되지만 나치측에 우호적이라고 비판받고...
저자는 아렌트와 토크빌을 다룬 이 책에서 수 회에 걸쳐 그 둘을 같이 묶은 이유를 강조한다. 2000년대 불기 시작한 아렌트 바람으로 많은 아렌트 번역서가 쏟아지고 먹물들도 심심하면 아렌트를 들먹거리는 현실에서, 아렌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시도는 찾기 힘들고, 또한 아렌트의 사상의 많은 부분이 토크빌에 빚지고 있거나 관련이 있음에도 토크빌에 대한 정당한 대우나 연구도 없다는 것이다. 아렌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토크빌의 연구로부터 이어지는 흐름을 알아야 하는데 이런 작업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아무튼 아렌트는 토크빌과는 달리 매우 어렵고 관념적이다. 저자가 탁월한 솜씨로 읽기 쉽게 풀어내 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토크빌 파트에 비하면 어렵고 읽는데 공이 드는게 사실이다.
-아렌트와 토크빌
저자는 아렌트와 토크빌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토크빌은 평등이 지나쳐 자유 없는 평등이 되면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민주적 전제주의가 된다고 보았는데, 아렌트는 그러한 전제주의가 전체주의를 낳았고, 전체주의를 벗어나는 길이 미국의 민주주의인데 오늘날(그녀가 살던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마저 전체주의로 빠졌다고 본 것이다.
토크빌과의 차이점이라면 아렌트는 모럴보다는 자연환경과 법제도를 중시했고, 또한 평등을 상당히 무시하고 자유가 민주주의에 중요하다고 본 점 등이다. 그녀는 평등과 자유를 철저히 분리하여 자유는 ‘공적인 것, 행동’으로, 평등은 ‘사적인 것, 노동’으로 구분한다. 그녀에게 민주주의의 요체는 자유이며, 평등은 자유를 파괴하는 문제점이다. 저자는 아렌트의 이러한 구분과 ‘악의 평등성’ 등의 시각에 대해 비판하나, 유대인으로서 전체주의에 의한 동족의 비극을 겪은 그녀의 삶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 아렌트와 제국주의
아렌트가 미국에 망명하여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표한 것이 1951년, 2차대전 직후였다. 아렌트는 여기서 19세기 성립한 ‘국민국가’ 가 ‘민족의식’과 충돌하여 제국주의를 나았다고 본다. 또한 부르주아의 정치적 해방, 즉 국민국가가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느끼고 정치적 지배에 나선 유산계층이 제국주의를 불러왔다고 본다. 저자는 이 맥락에서 CEO출신 대통령 이명박을 읽는다.
아렌트는 제국주의적 사고를 ‘과정적 사고’라 하는데, 이는 과정 자체에 기회가 주어지기에 언제나 변화를 추구하게 되어 지금 존재하는 것은 가치가 없어지고, 이러한 니힐리즘을 벗어나려 해도 모든 것을 과정의 한 단계로 변하게 하는 ‘과정의 법칙’속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모브의개념, 수용소 등과 함께 아렌트는 19세기 성립한 제국주의가 전체주의로 변하는 과정을 탐구하며 민주주의의 파멸적 단계에 대해 고찰한다.
아렌트의 연구는 매우 관념적이고 복잡하다. 솔직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여간, 아렌트의 연구는 여러 방향에서 비판받기도 했고, 하이데거와 관계를 지속하고 아이히만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이 나치전범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두둔한 것이라는 이유로도 비판 받았다. 또한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고대 아테네의 사회가 노예계급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엘리트 사회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저작이 전체주의라는 끔찍함을 극복하려는 시도였으며, 현대사회의 병폐를 예언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업적을 살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가장 비민주적인 전체주의라고 본 그녀의 관점이 현재의 대한민국에 큰 소용이 있다고 본다.
-책을 덮으며
이 책은 2008년에 출판되어 문체부 우수교양도서로 뽑혔다. 내가 읽은 것이 2012년이니 매우 늦게 읽은 셈이다. 우선은 저자인 박홍규의 명쾌함과 간결함, 그리고 날카로움을 강조하고 싶다. 토크빌과 아렌트라는, 결코 녹록지 않은 두 거장의 연구를 보기 좋게 정리했을 뿐 아니라,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효과적으로 핵심을 짚어 설명하였다. 게다가 단지 내용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은 점이 특히 빼어났다. 그 저작에 영향을 끼쳤을법한 두 학자의 삶의 진로를 배경지식으로 염두에 둘 수 있게 배려하였고, 이전까지 국내에서 제기되거나 소개된 내용에 대해 과감히 실명비판하며 명쾌한 논리로 새로운 독해를 주장했다. 번역의문제 뿐 아니라 해석의 문제, 바라보는 시각이나 강조점까지, 이전에 국내에서 주장된 내용들을 반박하는 글은, 도발적 제목이 왜 어울리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 두 거장의 저작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방점을 찍으며, 단순한 소개서가 아닌 훌륭한 교양서를 썼다고 본다.
나에게는 특히 아렌트보다는 토크빌의 견해가 많이 와 닿았는데, 어쩌면 토크빌은 미국 상황을 본떠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있고 아렌트는 어쩌다 이렇게 세상이 망가졌나를 주로 분석하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그들이 위치한 시대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아렌트의 글과 개념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클 것이다. 저자는 아렌트의 책과 한국에 나와있는 번역서들이 매우 난해해 독서에 고통이 따르기에 그를 줄이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 사실 저자가 뛰어난 능력과 노력으로 그 의도를 상당부분 이루었다고 보지만 나같은 사람에겐 이것마저도 어려운게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특히 토크빌 파트를 읽으며 지금 내가 숨쉬는 여기 이 땅의 현실에 더 유용한 부분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선거지상주의로 치닫는 정치현실이 그렇고, 자유 없는 평등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 현실이 그렇다. 19대 총선 이후 나도 상당히 ‘멘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19대 총선결과를 가지고 대의민주제를 비판하는 철없는 칭얼댐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가 끝날때마다 ‘국개론’‘20대 책임론’을 부르짖고, 국회정치를 일종의 전쟁으로 보며, 열심히 진영을 갈라 세를 불리는 것을 정의의 정치라고 믿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들었던 생각이다. 물론 묻지마 보수심리가 가장 큰 문제이나, 이에 대항한다는 사람들의 수준이 결코 그보다 낫지 않은 경우 절망은 더 깊어진다.
선거 전부터 들었던 생각이다. 과연 시민들이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을 믿고 투표를 하고, 인터넷에서 지지발언을 쏟아내고, 이런 움직임들이 정말 민주주의 본령과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한국정치가 이미 정당정치와 엘리트정치판이 되어버려 누구도 이에 의문이나 건설적인 비판을 던지지 않게 된 시대. 이것에 문제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진보신당의 비례1번이 당선되었다 해도 이 엘리트정치판에 균열이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 역량이 모두 선거로 집중되는 한국 정치에도 의구심이 들었다. 특히 선거로 일단 어떻게든 당선이 되야 힘이 생기고 바꿀 수 있는데 순진한 고민 하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의 일군의 중도세력들의 거센 함성도 고까웠다. (결국 소리높여 외치던 그들은 그 전쟁터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선거판에서 격추됐다.)
가장 답답한 현실은 이명박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세력에 대한 저항세력이 이자스민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격, 오원춘으로 인한 한국계 중국인에 대한 무차별적 비난 등의 강경 민족주의를 보이며 도한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원자력개발 찬성, 해군기지 찬성 등과 같은 이중적 사고를 한다는 사실이다. 해적기지 발언 때 일었던 거센 비난은 사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튀어 나왔다. 사람들은 자기의 진영을 정하고 자기의 정치적 스타를 정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데 거의 종교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배심제와 지방자치제는 있기는 하나 제도적 얼개만 있을 뿐, 한국인의 모럴을 이루지는 못한다. 꼰대 아저씨 마인드가 너무 많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규정하는 사람조차도.....
그런 의미에서 토크빌은 벙어리 냉가슴 앓던 나에게 일종의 빛과 같았다. 저자가 조근조근 알려준 토크빌에 의해 내 의문과 고민이 많은 부분 풀렸다. 우리가 현재 겪는 민주주의는 완전한 것이 아니며, 이는 분명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물론 참여민주주의나 연대와 같은 단어는 한국의 맥락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강조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이 목표하는 바와 필요한 이유, 그리고 구체적 방법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것은 단지 구호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한국식 대의민주제는 미국의 양당제 만큼이나 고착되어 고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다. 일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해방을 포기했을 것이고 군사독재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를 먼 얘기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10년, 20년은 빠르게 흘러간다. 많은 것들이 바뀐다.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력에 의해서. 더러는 운에 의해서.
'민주주의의 병폐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더 많은 민주주의, 그것이 토크빌과 아렌트가 말하는 그 민주주의가 아닐지.
'민주주의의 병폐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더 많은 민주주의, 그것이 토크빌과 아렌트가 말하는 그 민주주의가 아닐지.
이 책을 읽고 갑자기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몇 가지.
.주간 <시사인>의 1면짜리 연재기사, <풀뿌리 수첩>
.미드 Parks and recriation
.원순씨
.동네 반상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