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화차>, 그녀의 자취는 지옥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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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미야베 미유키 저, 박영난 역
시아출판사, 2006.10.31
페이지 461, 판형 A5, 148*210mm 가격 12,000 원




사회파 계몽소설?

화차는 분명 소기의 목적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1992, 한국이 세계화라는 호구 짓으로 국제시장에 곳간 문을 활짝 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일본은 버블경제의 끝자락 즈음이었을 것이다. 부동산 호황을 바탕으로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 그 거품 사이에서 짓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야베 미유키 (이하 미미여사’)는 이런 현실에 대해 그 펜 끝을 들이댄다. 독자에게 개인 파산이라는 것을 알리고, 어째서 개인이 빚의 굴레에 떨어지게 되는지를 설명하며 조심하라고 말한다.

화차는 분명 매우 잘 된 미스터리며, 훌륭한 미스터리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일단 서사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다. ‘사라진 약혼녀, 알고 보니 다른 이의 이름으로 행세 해왔다.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 왜 사라진 걸까?’ 이 기본얼개만 봐도 너무 매력적이다. 심지어 약간의 조정을 거쳐 옆 나라에서 20년 후에 영화로 개봉해도 여전히 훌륭할 만큼.

 그 기본 얼개를 쫓는 과정도 충분히 스릴을 준다. 미미여사가 스릴과 서스펜스를 주는 방법은 아슬아슬한 추격전이나 목숨을 건 두뇌싸움이 아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고 어떻게 아웃사이더로 전락하는지, 그를 몰아넣는 돈의 덫이 얼마나 서늘하고 날카로운지, 그 과정에서 사회란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며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화차가 미미여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일반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처럼 사회적 모순이 범죄의 원인이라거나 하는 지점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의 가장 중요한 서스펜스를 제공하는 것 자체가 바로 사회의 모순이라는 그 훌륭한 구성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다만 미리 알고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미미여사는 훌륭한 미스터리를 구성해내면서도, 그 안에 (나는 그것이 그녀가 의도적으로 목적한 바라고 보는데) 당시 사회에서 개인부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마나 작은 일로 고액채무자가 되고 일상생활이 망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구제책인 개인 파산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세히 알린다. 이를 몰라 가족이 흩어지고, 죽고, 인생을 망치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파산을 받기 위한 절차까지 세세하게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설명한다. ‘화차를 단지 하나의 순수한 문학작품이라고 본다면 이 지나친 중언부언의 설명 부분이 거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에서 이 소설을 읽을 때 이 시차를 감안해야 한다. 거품경제 안에서 흥청거리던 일본에서는 막 붐이 일기 시작한 신용카드와 현금서비스 등으로 인해 아무 금융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부채의 늪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그 늪은 그와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미미여사는 그러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변경시키고자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이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지나친 사족으로 보이는 설명부분은 흠결이라 하긴 어렵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

이렇듯 이 소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시론적인 면이 있기에, 그 생명력이 짧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까지도 이 소설이 평가 받으며 새로 읽히고 영화로 만들어지고 하는 것은, 두 가지,

1.     미스터리소설로써 훌륭하다
2.     그녀가 지적하는 문제점이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라는 이유일 것이다.

 훌륭한 미스터리라는 점은 위에서 언급했고, 두번 째 이유를 생각해 보자.
 일본은 이 소설이 발매된 이후 버블의 붕괴와 함께 침체를 겪게 된다. 당연히 부채의 덫에 걸리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불황의 늪은 아직도 일본의 목을 죄고 있다.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이는 자본주의의 광채가 비추는 어느 지점인가에 필연적으로 드리워지는 그늘인지도 모른다. 사회 안전망은 빈약한데 자본의 힘은 끝 없이 팽창하고, 그 안에서 금융은 모든 것 집어삼키며 위세를 더해간다. 일반적인 개개인은 그 물결 안에서 휩쓸리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늘 완벽한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충분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일본과 한국의 일반 서민의 처지는 비슷하다. 신 자유주의의 도입으로 인해 갈수록 강퍅해진다. 9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의 인민은 닮았다. 우리가 20년 전 일본에서 출간된 화차가 지금-여기에서 생동감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일 게다.












변영주 감독

이선균, 김민흐, 조성하 외 




영화 <화차>

영화를 보고 감탄했고, 그 뒤 소설을 본 뒤에 영화에 다시 한 번 더 감탄했다.
소설 화차가 영화보다 뒤쳐져서가 아니라, ‘화차라는 소설을 이렇게 적절하고 영리하게 스크린으로 옮긴 것에 감탄 한 것이다.
 변영주감독은 소설을 영화적 문법에 맞도록 새 호흡으로 바꾸고, 작은 반전을 가미하고, 인물 관계를 재설정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동정은 가지만 이해하기엔 너무 실체가 없던 교코, 안타까운 공감이 가는 차경선으로 새로 숨을 불어넣었다
 가장 인상적인 변경점 이라면 호두엄마의 반전이고, 가장 의미 있는 변경점 이라면 펜션의 살인장면일 것이다. 펜션의 살인 장면을 직접 넣은 것은 영화기 때문에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일수도 있겠지만 그 장면을 끔찍한 피바다에서 몸부림치는 경선과 나비의 모습으로 최대한 절제하여 보여준 것이 훌륭했다
 이 작품에서 나비는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경선의 탈피욕망을 보여주는 장치인데, 극 초반 화장실에 떨어진 나비머리핀 (추락한 나비의 꿈) ->펜션의 피바다에서 헤엄치는 나비 (피바다 같은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나비) ->호두엄마의 머리에 꽃힌 나비머리핀 (새로이 날아오르려는 나비) 로 변주되며 경선이 처한 현실이나 내면을 보여준다.

 캐릭터의 설정이나 분량,관계 등도 눈에 띄는데, 사건을 혼마에게 던져주고는 결국 중반엔 출연이 없어지는 원작의 약혼자와 비교하면 술로 밤을 지새고 무너져가는 문호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원작에서 약혼자는 결국 포기하고, 이후 혼마가 교코를 뒤쫓도록 추동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치 않다. 형사라는 직업정신과 진실을 알고싶은 호기심 정도로 혼마는 끝까지 내달리고, 그 파트너로 쇼코의 고향친구와 동료형사 정도가 낮은 비중으로 출연한다. 혼마가 쇼코를 추적해가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형사로서 살인의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선을 찾는 이유는 원작과 달리 문호가 집착을 놓지 못하는 부분이 더 크다. 경선을 찾는 여정에서도 문호는 적극 동참한다. 형사는 전직이 되었다. 전직 형사인 종근은 처음엔 사촌동생의 간절함과 복직을 위한 사건성에 이끌리며, 사랑인지 집착인지 자신도 모를 문호의 무너져가는 복잡한 마음과 함께 종근도 사건성에 대한 기대와 경선에 대한 호기심이 뒤섞이며 좀더 다양한 층위에서 경선을 뒤쫓는 추동력이 형성된다.

이러한 변경점은 아마 시나리오작업만 3년을 했다는 변감독의 수고에서 나왔을 것이다. 결국 영화는 소설에 못지 않은 훌륭한 작품으로 새로 태어났다. 과장 없는 절제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 ( 이선균이 연기 잘하는거 맞구나! , 김민희의 재발견! ) 이 어우러져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결말에 경선이 왜 그렇게 영화 엔딩적으로 죽어야 했는가?” 이다. 원작에서는 새로운 사냥감과의 약속장소에서 형사들이 교코를 잠복,포위한 상황으로 끝이 난다. 여운을 남기는 전형적인 결말이지만 크게 불만이 남진 않는다. 오히려 그 노린듯한 여운이 씁쓸하게 감도는 느낌이다. 하지만 영화의 경우 정말 현명하게 구축한 이야기가 마지막에 감정과잉이라는 잘못된 코스로 이탈한 느낌이다. 문호와 경선의 에스컬레이터 장면은 감정선을 자극하는 명장면으로, 이 영화가 소설과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 방향성의 합당한 도착점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백화점에서의 추격과 추락은 과연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실체가 잡히지 않는 익명적인 그 누구로서의 교코에 비해 가련한 살아있는 여인경선이라는 인물이기 때문에 맞아야만 할 파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빌딩 옥상에 맨발로 올라간 여성, 그리고 뛰어내려 사지가 비틀린 채 죽는 그 장면이 좀 고루해 보여 아쉽다. 이 영화는 더 나은 엔딩이 어울리는 작품이니까.

삼국지에 관한 단상.txt

!주의! [두서 없음] [편견 있음] [삼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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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 해치웠다-!”

어제도 잠들기 전 이불 안에 파묻혀 진삼국무쌍6psp로 플레이 했다.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모던하게 재해석된 복장과 외모의 수 많은 삼국시대의 장수들을 컨트롤해 전장을 누비며 적들을 자살刺殺, 창살創殺,박살撲殺하는 재미는 중독적이다
 사실 게임의 장르 구분을 제외하면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본의 코에이가 발매한 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 89년 발매되어 얼마 후 한국에서 불법으로 (디스켓 to 디스켓의 꽃피는 우정) 유통되며 큰 히트를 쳤으니 삼국지 게임이 소년들의 잠 못 이루는 밤에 큰 기여를 해 온 것도 물경 20년이다. 요즘은 국산 MMO RPG나 웹게임에도 삼국지는 훌륭한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비단 게임 뿐일까. 삼국지연의의 일부를 바탕으로 한 중국 영화가 흥행몰이를 하고, 중국에서 만든 삼국지 드라마 역시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이다. 동아시아3국에서 삼국지는 크로스-오버의 날개를 달고 바야흐로 끝나지 않는 전성시대를 누리는 중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요시카와 에이지 부터 장정일까지

 이문열, 정비석, 황석영, 장정일… 20세기 이후 삼국지에 손을 댄작가들 중 일부의 이름이다. 일본에서도 요시카와 에이지, 기타가타 겐조 등의 작가들이 삼국지로 유명하다. 요시카와 에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로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로, ‘39년에서 ‘40년에 걸쳐 일역판 삼국지를 발표하며, 조조의 북위 정통론에 입각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후 ‘40년대 국내에도 삼국지가 계속되어 출간되는데, 놀랍게도 그 이름 중에 황순원과 김동리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지는 20세기에 뒤늦게 한국에 전파된 것일까? 삼국지에서 유래한 각종 사자성어를 생각하면 아닐 터. 이미 조선 전기에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주간경향 기사 링크 클릭 일본에서는 연의가 전래된 것이이보다 늦은 17세기경이며 역사서 삼국지는 그 이전에도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위키피디아 日本における国志受容流行 항목 링크 클릭 ). 물론 정사와 연의의 차이가 있을 것이며 전래시기도 양 쪽 모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요는 이미 15세기경 삼국지는 이미 전파되었으며, 인의와 충을 핵심가치로 삼는 유교적 세계관과 맞물려 삼국지가 받아들여졌을 거라는 점이다. 삼국지의 고사와 사자성어는 교양이자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며, 심지어 한국에서는 한 때 수험생 논술의 필독서라고 불리었을 정도이니. (아니, 인과 충을 강조하며 주군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인간, 전쟁을 통해 가치를 실현시키려는 군상들의 이야기를 현대 민주공화국에서 학생들의 대학 입학시험의 텍스트로 삼았다고? ..그랬다. 물론 논술문제로 출제되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일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대입용 논술준비용 텍스트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부여가 된다는 점이 문제다.) 한국의 주류 사회에서 삼국지는 늘 권장도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장정일의 삼국지는 황건의 난을 농민봉기로 평가하는 등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했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다. 그러고 보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삼국지는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이다. 우리나라의 판소리 적벽가가 그랬다는 것처럼, 고우영의 삼국지도 죽고 죽이는 살육과 권력다툼의 무상함을 종종 드러내며 유머러스하면서도 인본주의적인 필치로 삼국지를 훌륭히 그려냈다.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그것은 비교도 안되더라.)

삼국지는 양서인가?

 삼국지가 이렇게까지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요행이 아니다. 삼국지는 이야기 얼개와 세 세력간의 힘의 균형, 수많은 매력적인 등장인물들, 권력암투,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지혜로움, 신출귀몰하는 책략 등 매력적인 이야기의 요소를 너무도 잘 갖추고 있다. 위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은 그 원석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용방식에 대한 시각이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부분을 본받을 가치로 뽑아낸다거나 사회적으로 청소년에게 권장할만하지는 않다고 보는데, 그러한 인식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권장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얘기다.

삼국지에서 마키아벨리즘적인 지혜를 얻을 수도 있고, 경쟁사회에서 통용될만한 참고를 얻을 수도 있다. 기본 얼개인 세 세력간의 힘의 균형상황에서의 술수들은 참고,활용할만한 지혜가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그 안에 나오는 수많은 군상들의 일화나 고사 하나하나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저절로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윗사람에 대한 충성’,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등을 읽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맥락에서,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으로 권장되는 삼국지는 부작용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특히, 청소년에게 삼국지를 권할 때는, 과연 어느 부분이 권할만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삼국지가 과연 어떤 층위에서 권장할만한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적어도 삼국지를 무비판적으로 읽는다면 민주적 가치보다는 미화된 봉건적 질서가 체화될 가능성이 있다. 아직도 군주를 위해 낡은 창 한 자루를 들고 적진으로 돌진하는 부하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삼국지는 좋은 이야기이지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금 걱정스러운 것이다. 다행인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삼국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 언급한 장정일의 삼국지도 그렇지만, 삼국지는 분명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재해석되고 변용 될만한 생명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게임으로, 영화로, 만화로 삼국지를 새롭게 쓸 때마다, 삼국지는 조금씩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 믿는다


<에브리맨>, 우린 모두 늙거나 혹은 죽는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저,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09.10.15
페이지 192, 판형  A5, 148*210mm, 가격 9,500원





여기, 사람들이 앉아 서로 토해내는 신음을 듣는 곳,
중풍환자가 몇 가닥 남지 않은 마지막 을씨년스런 머리카락을 흔드는 곳,
젊은이가 창백해지고 유령처럼 마르다가 이내 죽는 곳,
무슨 생각만 해도 곧 그득한 슬픔이 밀려오는 곳…. 

존키츠, <나이팅게일>
(이 책의 서문)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생로병사에 대한 고찰

이야기는 한 남자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친지 몇만 조촐히 모인 장례식 후 그의 지나온 삶이 펼쳐진다.
아니, 펼쳐진다고 표현하기엔 이 소설의 이야기나 문체는 담담하다.
작가는 화려한 표현이나 미문 대신 묵직하면서도 조용한 필치로 한 남자의 삶을 그려 보이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이 이야기에 날카로운 매력이 더해진다.

지나치는듯한 한마디에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노사老師의 지혜가 엿보이는 식이랄까.
그렇다고 의미심장한 표현이나 현학적인 비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담담하게, 물 흐르듯이 전개되면서도 그 안에서 종종 가슴에 무겁게 내리 꽂히는 부분들이 이 소설의 백미이며, 그것이 필립 로스가 어째서 대작가의 반열에 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생자필멸의 굴레, 그 슬픔과 아쉬움의 뒤범벅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는 작품을 관통하듯 아버지에게서 딸로 대물림되는 다음 대사에 드러나 있다.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여차 저차 살다 어찌 저찌 죽다.

저자는 담담한 필치로 '그'의 삶을 재구성하며 보여준다.
 ‘는 보석상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을 좋아해 화가를 꿈꿨지만 생활을 위해 광고회사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성공한다.

는 세 번의 결혼을 했고 세 번 실패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첫 번째 결혼에선 두 아들 외엔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다. 두 번째 결혼은 같은 회사의 부하직원이던 피비였다. 천사 같은 딸 낸시를 얻지만 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던 열정과 욕망에 따른 외도 때문에 두 번째 결혼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세 번째는 외도상대였던 젊은 모델이었고, 결혼 후에 큰 일을 겪게 되면서 그는 그가 실수했음을 알게 된다.

에게 처음 찾아온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두려움이었다. 2차대전 때 유보트의 공격으로 난파된 배에서 나온 선원의 시체가 해안으로 떠밀려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병실에 누워 죽어가는 옆 침대의 소년을 보며 그는 그 두려움을 생각했다.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투명하던 바다가 난파된 배의 기름에 뒤덮여 밑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곳에 선원의 시체가 떠밀려 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그에게 죽음이란 밑이 보이지 않는 바닷물, 그리고 그 속에 잠긴 소름 끼치는 시체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이후 그가 수영을, 특히 바다수영을 즐긴 것은 그런 두려운 죽음의 이미지에 맞서기 위한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보아 '그'의 삶은 남 부러울 것이 없다. 유대인 보석상의 아들로, 미국에서의 주류 백인으로, 광고계에서의 성공적인 경력으로, (20살 이상 어린 늘씬한 모델과의 관능적 사랑을 포함한) 세 번의 결혼으로. 메디케어를 받고 있으며 부유한 은퇴자 마을에 입주하여 어릴때의 꿈인 그림을 그리며 그림교실도 열었다. 이 정도면 제3세계는 고사하고 같은 미국의 보통사람이 보기에도 꽤 성공한 인생 아닌가.
하지만 이 소설의 서술을 따라 보고 있자면 그의 삶에는 늘 회한과 서늘함이 감돈다. 특별한 고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설명하는 의 이야기는 유년시절에서 그의 결혼생활로, 그리고 그의 노년생활로 이어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연대기적이 아니고 과거의 이 시점과 저 시점을 오락가락 하는데, 중요하게 서술되는 부분은 그의 실패한 가정생활과 그의 건강문제이다. 유년시절 탈장 수술을 받은 뒤로 청년기 이후에 성의 욕망에 충실했던 그는 장년 이후 건강 문제로 7년 연속 병원 신세를 진다

이렇게 이 책에서 말하는 그의 인생에 인생의 건강했던 때와 성공적인 직장생활에 대한 부분은 최소한도만 표현되고 스쳐 지나가듯 설명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이 소설의 서사가 (3인칭의 객관적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고인이 무덤에서 지난 날을 회고하는 듯한 분위기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는 건강히 썩 좋은 편은 아니었고, 생애 동안 저 죽음이 밀려오는바다에 맞서 파도를 헤치며 헤엄을 쳐댔지만 그 두려움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게 되는 순간은 개체화가 이루어지는, 숭고한 단독성이 확립되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 그리고 죽음과 다름 없는 비인격화의 정반대되는(본 책 p139) 신성한 성적 만남을 가질 때였다. 그가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불륜을 저지를 것도 어쩌면 수영과 마찬가지로 무의식 중에 죽음에 반대되는 어떤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을까?

루페와 다이아몬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두 죽음에 도달하거나 가까워진다. ‘’, ‘의 부모, 직장동료, 전처, 은퇴자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그의 삶의 막바지에 그는 심하게 고독하다. 딸과 함께 살 계획은 그의 결혼생활 중 유일하게 사랑했던 전처 피비의 중병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건강한 형에 대한 질투로 그렇게 서로 아끼던 형과도 소원해졌다. 젊을 때의 성적 매력도 없다. 그가 마음을 둔 안 은퇴자의 부인은 지독한 허리통증에 수면제로 자살했다. 그의 첫 처와 그 아들들은 그를 원수로 여긴다. 은퇴한 직장동료들도 죽거나 죽어간다
 그 고독 속에서, 단독자로서의 그는 죽음을 더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끝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지만, 결국 죽음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진 후에 죽는다.

 결국 이 소설은 의 삶을 조용히 되돌아봄으로써 모든 사람 everyman’에 대해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보통 사람 everyman’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사람은 날 때부터 유한한 존재이다. 어떤 삶을 살았든 죽음은 찾아오고, 그 운명 앞에 우리는 저마다 단독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 불교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일생을 통해 어떤 영원성을 추구할 것이다. 무언가는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 무의식 중에 영원을 추구하는 행위일지도 모르는 번식욕구 등.
 ‘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보석상의 이름은 ‘Everyman’이었다. 이 경우엔 보통 사람’. ‘엘리자베스라는 항구도시의 주머니사정이 넉넉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다이아몬드와 시계를 팔았다. 가게의 이름, 그리고 취급품목에서 나는 이 부분이 작가의 거대한 메타포라고 생각했다.
보통사람을 상대로 파는 영원성의 상징 다이아몬드, 시계, 아버지가 항상 지니다가 무덤까지 같이 들어간 루페. 사람들은 어떤 영원성을 추구하며, 가족 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한 영원성을 바라며 다이아반지를 산다. 하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며, 시간이 흐르면 그 보통사람들도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루페를 통해 다이아를 바라보는 보석상처럼, 생애동안 아주 작은 관을 통해 어떤 영원성을 추구하다가 죽어버리는건지도 모른다. 그게 누구라도.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냥 서서 받아들이는 것. 그 자세. 어쩌면 그것만이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영원성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보는 내내 나와 우리 가족을 생각했다. 별(別)세계를 배경으로 별세계의 이여기가 펼쳐지는데도, 몰입시키는 것이 보편적인 좋은 소설의 힘이자 이 소설의 힘일 것이다. 생과 사에 대한 무거운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작품 내내 주인공의 이름을 등장시키지 않고 라고 지칭한 필립 로스가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을 읽고 커트 보네거트의 한마디가 생각났다. 
"그렇게 가는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