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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미야베 미유키 저, 박영난 역
시아출판사, 2006.10.31
페이지 461, 판형 A5, 148*210mm 가격 12,000 원
사회파 계몽소설?
화차는 분명 소기의
목적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1992년, 한국이
‘세계화’라는 호구 짓으로 국제시장에 곳간 문을 활짝 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일본은 버블경제의 끝자락 즈음이었을 것이다. 부동산 호황을 바탕으로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 그 거품 사이에서 짓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야베 미유키 (이하 ‘미미여사’)는
이런 현실에 대해 그 펜 끝을 들이댄다. 독자에게 ‘개인
파산’이라는 것을 알리고, 어째서 개인이 빚의 굴레에 떨어지게
되는지를 설명하며 ‘조심하라’고 말한다.
화차는 분명 매우
잘 된 미스터리며, 훌륭한 미스터리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일단
서사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다. ‘사라진 약혼녀, 알고 보니
다른 이의 이름으로 행세 해왔다.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 왜
사라진 걸까?’ 이 기본얼개만 봐도 너무 매력적이다. 심지어
약간의 조정을 거쳐 옆 나라에서 20년 후에 영화로 개봉해도 여전히 훌륭할 만큼.
그 기본 얼개를 쫓는 과정도 충분히 스릴을 준다. 미미여사가 스릴과
서스펜스를 주는 방법은 아슬아슬한 추격전이나 목숨을 건 두뇌싸움이 아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고
어떻게 아웃사이더로 전락하는지, 그를 몰아넣는 돈의 덫이 얼마나 서늘하고 날카로운지, 그 과정에서 사회란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며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화차가
미미여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일반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처럼 사회적 모순이 범죄의 원인이라거나
하는 지점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의 가장 중요한 서스펜스를 제공하는 것 자체가 바로 사회의 모순이라는
그 훌륭한 구성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다만
미리 알고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미미여사는 훌륭한 미스터리를 구성해내면서도, 그 안에 (나는 그것이 그녀가 의도적으로 목적한 바라고 보는데) 당시 사회에서 개인부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마나 작은 일로 고액채무자가
되고 일상생활이 망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구제책인 ‘개인
파산’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세히 알린다. 이를 몰라
가족이 흩어지고, 죽고, 인생을 망치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파산을
받기 위한 절차까지 세세하게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설명한다. ‘화차’를 단지 하나의 순수한 문학작품이라고 본다면 이 ‘지나친 중언부언’의 설명 부분이 거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에서 이 소설을 읽을 때 이 ‘시차’를 감안해야 한다. 거품경제 안에서 흥청거리던 일본에서는 막 붐이 일기 시작한 신용카드와 현금서비스 등으로 인해 아무 금융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부채의 늪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그 늪은 그와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미미여사는 그러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변경시키고자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이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지나친 사족으로 보이는 설명부분은 흠결이라
하긴 어렵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
이렇듯 이 소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시론적인 면이 있기에, 그 생명력이 짧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까지도 이 소설이 평가 받으며 새로 읽히고 영화로 만들어지고 하는 것은, 두 가지,
1.
미스터리소설로써 훌륭하다
2.
그녀가 지적하는 문제점이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라는 이유일 것이다.
훌륭한 미스터리라는 점은 위에서 언급했고, 두번 째 이유를 생각해
보자.
일본은 이 소설이 발매된 이후 버블의 붕괴와 함께 침체를 겪게 된다. 당연히
부채의 덫에 걸리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불황의 늪은 아직도 일본의 목을 죄고 있다.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이는 자본주의의 광채가
비추는 어느 지점인가에 필연적으로 드리워지는 그늘인지도 모른다. 사회 안전망은 빈약한데 자본의 힘은
끝 없이 팽창하고, 그 안에서 ‘금융’은 모든 것 집어삼키며 위세를 더해간다. 일반적인 개개인은 그 물결
안에서 휩쓸리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늘 완벽한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충분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일본과 한국의 일반
서민의 처지는 비슷하다. 신 자유주의의 도입으로 인해 갈수록 강퍅해진다. 9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의 인민은 닮았다. 우리가 20년 전 일본에서 출간된 화차가 지금-여기에서 생동감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일 게다.
변영주 감독
이선균, 김민흐, 조성하 외
영화 <화차>
영화를 보고 감탄했고, 그 뒤 소설을 본 뒤에 영화에 다시 한 번
더 감탄했다.
소설 화차가 영화보다 뒤쳐져서가 아니라, ‘화차’라는 소설을 이렇게 적절하고 영리하게 스크린으로 옮긴 것에 감탄 한 것이다.
변영주감독은 소설을 영화적 문법에 맞도록 새 호흡으로 바꾸고, 작은
반전을 가미하고, 인물 관계를 재설정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동정은 가지만 이해하기엔 너무 실체가 없던 ‘교코’를, 안타까운 공감이 가는 ‘차경선’으로
새로 숨을 불어넣었다.
가장 인상적인 변경점 이라면 ‘호두엄마’의 반전이고, 가장 의미 있는 변경점 이라면 ‘펜션의 살인’ 장면일 것이다. 펜션의
살인 장면을 직접 넣은 것은 영화기 때문에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일수도 있겠지만 그 장면을 끔찍한 피바다에서 몸부림치는 경선과 나비의 모습으로
최대한 절제하여 보여준 것이 훌륭했다.
이 작품에서 나비는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경선의 탈피욕망을
보여주는 장치인데, 극 초반 화장실에 떨어진 나비머리핀 (추락한
나비의 꿈) ->펜션의 피바다에서 헤엄치는 나비 (피바다
같은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나비) ->호두엄마의 머리에 꽃힌 나비머리핀 (새로이 날아오르려는 나비) 로 변주되며 경선이 처한 현실이나 내면을 보여준다.
캐릭터의 설정이나 분량,관계 등도 눈에 띄는데, 사건을 혼마에게 던져주고는 결국 중반엔 출연이 없어지는 원작의 약혼자와 비교하면 술로 밤을 지새고 무너져가는 문호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원작에서 약혼자는 결국 포기하고, 이후 혼마가 교코를 뒤쫓도록 추동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치 않다. 형사라는 직업정신과 진실을 알고싶은 호기심 정도로 혼마는 끝까지 내달리고, 그 파트너로 쇼코의 고향친구와 동료형사 정도가 낮은 비중으로 출연한다. 혼마가
쇼코를 추적해가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형사로서 ‘살인의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선을 찾는 이유는
원작과 달리 문호가 집착을 놓지 못하는 부분이 더 크다. 경선을 찾는 여정에서도 문호는 적극 동참한다. 형사는 ‘전직’이 되었다. 전직 형사인 종근은 처음엔 사촌동생의 간절함과 복직을 위한 사건성에 이끌리며,
사랑인지 집착인지 자신도 모를 문호의 무너져가는 복잡한 마음과 함께 종근도 사건성에 대한 기대와 경선에 대한 호기심이 뒤섞이며 좀더
다양한 층위에서 경선을 뒤쫓는 추동력이 형성된다.
이러한 변경점은
아마 시나리오작업만 3년을 했다는 변감독의 수고에서 나왔을 것이다. 결국
영화는 소설에 못지 않은 훌륭한 작품으로 새로 태어났다. 과장 없는 절제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 ( 이선균이 연기 잘하는거 맞구나! , 김민희의 재발견! ) 이 어우러져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결말에 “경선이 왜 그렇게 ‘영화 엔딩적’으로 죽어야 했는가?” 이다. 원작에서는
새로운 사냥감과의 약속장소에서 형사들이 교코를 잠복,포위한 상황으로 끝이 난다. 여운을 남기는 전형적인 결말이지만 크게 불만이 남진 않는다. 오히려
그 노린듯한 여운이 씁쓸하게 감도는 느낌이다. 하지만 영화의 경우 정말 현명하게 구축한 이야기가 마지막에
‘감정과잉’이라는 잘못된 코스로 이탈한 느낌이다. 문호와 경선의 에스컬레이터 장면은 감정선을 자극하는 명장면으로, 이
영화가 소설과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 방향성의 합당한 도착점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백화점에서의
추격과 추락은 과연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실체가 잡히지 않는 익명적인
‘그 누구’로서의 교코에 비해 가련한 ‘살아있는 여인’ 경선이라는 인물이기 때문에 맞아야만 할 파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빌딩 옥상에 맨발로 올라간 여성, 그리고
뛰어내려 사지가 비틀린 채 죽는 그 장면이 좀 고루해 보여 아쉽다. 이 영화는 더 나은 엔딩이 어울리는
작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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