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 정보
|
|
제목
|
런던통신 1931-1935
|
저자/역자
|
버틀란드 러셀 / 송은경
|
출판사
|
사회평론
|
출간일
|
2011.4.21
|
페이지
|
557p
|
판형
|
A5,
148*210
|
가격
|
14,800원
|
철학자의 사유
‘런던통신’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양심적 지식인, 버트란드 러셀이 약 5년간 신문지상에
연재한 짧은 글들을 묶은 책이다. 1931년부터 1935년,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난 후, 이
기간동안 러셀은 신문 지상에 연재하는 글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 대한 통찰을 통해 독자의 사유를 자극한다. ‘서양
철학사’로 유명한 러셀이기도 하지만, 그를 ‘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의 글들 전체를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그의 글들은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르게 보기, 다르게 생각하기’의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실천이다. 쉽게 넘겨버릴 수 있는 전통이나 인습, 믿음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며 통념을 외부로부터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 전투적이고 공격적이란 뜻은 아니다. 신문을 읽는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글이니만큼 쉽고도 명확한
언어와 번뜩이는 재치, 위트가 가미된 반어법으로 이루어진 글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전투적인 외침이 아니라 읽으면서 감탄하고 공감하고 미소 짓게 하는 사유의 결과물들이다. 철학자의
사유면서도 난해하지 않고, 통념을 공격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그
지점이 바로 이 노장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 아닐까.
칼럼의 본연
5년간의 연재기간 동안 그는 인간의 삶, 감정, 정치, 윤리, 의식, 국제정세, 문명, 사회제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귀족가문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종교, 폭력, 전제정치, 제국주의, 전쟁, 남성우월주의, 미신, 독재, 노예제도, 핵무기, 천민 자본주의 등 기득권과 기존의 갖은 선입견에 대해 대항해 온 그의 삶의 기본적인 태도가 글 여기저기에 녹아
들어 있다.
근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아일랜드의 농촌이나 중국 등에도 체류한 그의 이력도 한 몫 하는데, 문명과 비문명을
비교하는 사유에서는 전자가 드러나고, 중국 체류 경험은 당시 서구에서도 흔치 않았던 동양에 대한 지식이
엿보인다. 중국의 노자 등 도교에 대한 언급, 주지육림 설화에
대한 언급이 보이고,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의 한국인 학살이나 한국(조선)궁궐에서 신하가 임금 앞에서 언제나 몸을 떨어야 했다는 등의 언급이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러셀은 이렇듯
자신의 다양한 체험과 사유를 이용해 짧지만 실한 칼럼들을 많이 남겼다. 사실 대부분의 칼럼이 두 장
내외의 짧은 글들인데, 500쪽이 넘는 책이 이렇게 짧은 호흡으로 계속되다 보니 앉은 자리에서 죽 읽기가
좋은 편은 아니다. 게다가 쉬운 언어로 쓰여진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곱씹어볼 부분이 많아서
결코 단시간에 독파를 추천할만한 책이 아니다. 아마도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하루에 너댓편 정도씩
꾸준히 읽는 편이 좋지 않을까. 반납기일이 걸려서 허겁지겁 읽어 치우고 나니 떠오른 아쉬움이다.
세상은 변했지만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쓰인 글들이라면, 대충 평균을 계산해보면 10년만 더 있으면 100년을 묵힌 셈이 된다. 제1차대전
이후, 대공황과 뉴딜의 시대, 우리 선조들은 일제 강점기
아래 있었던 그 시대. 그럼에도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러셀의 사유들은 낡은 생각들이 아니라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사유들이며, 지금 봐도 새롭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급진적이기까지 하다. 러셀의 사유의 기준점이 그 시대 자체나 스스로의 이해관계였다면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문학작품의 경우 후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하더라도 문학성을 인정받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지만, 100년 후에도 빛이 바래지 않는 칼럼이란 것은 저자의 사유가 시간을 관통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게다.
예를 들면, 인간 본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급 들이다.
“사실 낙관주의는 신뢰 할만 한 때에는 유쾌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엄청 짜증스럽다. 특히 짜증스러운 것은 우리와 곤경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자들이 우리의 곤경에 대해 낙관주의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다.”
–‘낙관주의에 대하여’
“세계사에는 네 종류의 시대가 있었다. 모두가 자기는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대, 아무도 자기가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대, 현명한 사람들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시대, 어리석은 사람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시대. …첫 번째는 안정의 시대, 두 번째는 서서히 쇠퇴하는 시대, 세 번째는 진보의 시대, 네 번째는 재앙의 시대다. (이후 러셀은 이를 차례대로 원시시대, 기독교 이전의 고대시대, 18~19세기, 그리고 러셀 자신이 살고 있던 당시로 소개한다.)
-'바보들만 똑똑한 시대'
요즘 사회에서
논의되는 일들에 대한 참고도 얻을 수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파리 한 마리도 해치지 못할 정도로 유순하고 온화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 이에 대해선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파리를 향한 자비심이 인간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 ‘채식주의자도 사납다’
“학창시절에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이다. … 이런 감정은 도덕적 분개로 정당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 자신은 결코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는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고픈 욕구에 불과하다.”
–‘체벌의 악영향’
“속담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주로 상상의 산물이다. 대체로 속담은 상반된 내용을 가진 것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 200년 전에는 라틴어로 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진실로 여겼다. 셰익스피어의 구절을 인용해도 그와 비슷한 힘을 갖게 된다.”
–‘속담은 어디에서 왔을까?’
두 개의 민주주의
500쪽 넘게 가득 들어찬 러셀의 날카로운 사유들 사이에서도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통찰이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2012 대선용 급조기획 취급이나 받는 경제민주주의를 1930년대의 러셀이 강력히 주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 러셀은
초기 자본주의의 야만적 모습과 미국의 대공황, 귀족을 대체해 가던 부르주아들을 보며 민주주의에 대해
숙고하게 되지 않았을까.
러셀은 일단 민주주의는 훌륭한 제도임을 인정하나, 그 불완전성을 인정치 않고 무조건적인 찬양을 한다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약점을 수정할 수 없게 되어 위험해 진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약점은 정치적으로 보면 다수의 폭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토크빌적인
견해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경제적인 민주주의가 수반되지 않는 정치적 민주주의는 반쪽 짜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정치적 민주주의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까지 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복수의 칼럼을 통해 드러난다.
“민주주의가 필요한 까닭은 인간 본성에 담긴 충동의 힘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바람직한 까닭은 평범한 유권자가 무슨 정치적 지혜를 많이 지녀서가 아니다. 인류의 어떤 집단이든 일단 권력을 획득하면, 나머지 집단을 삶의 좋은 것들을 누리지 않고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을 입증할 목적으로 각종 이론을 창안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행의 십자가만 짊어지게 되리니’
(러셀은 먼저 17~18세기 영국 귀족이 임금생활자들을 극빈상태로 몰아가는 법률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그러한 귀족의 삶을 기록한 ‘그레빌’이라는 사람의 일지를 인용한다. 일지에는 귀족부인과 그 딸이 빈민들을 방문하여 ‘시찰’하고 자비롭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찬양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편리하게도 불과 18개월 전에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않는다. 소작농들이 얼마나 ‘기뻤던지’ 폭동을 일으키고 볏짚더미를 불태우는 바람에 몇 사람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종신 유배형을 선고 받았던 사건 말이다. …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자선’의 가능성조차 없을 것이다.”
–‘자선이 사라진 사회’
“예외적인 특권에 의지하는 보장은 불공정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불공정을 변명할 핑계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은 왜곡된 도덕관념을 지닐 수 밖에 없다. … 운 좋은 소수만을 위한 보장제도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보장제도가 있어야 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현재와 같은 경쟁체제가 존속하는 한 불가능 할 것이다.”
– ‘무정한 부자들’
“민주주의의 즐거움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데 있지,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양보하는데 있지 않다. …사람들은 경제 민주주의와 교육 민주주의가 수반되지 않는 정치 민주주의는 엉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주주의의
위험성’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론 나름대로 중요하다. 과도한 억압을 방지하여 경제력의 평등한 분배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마 경제적 정의가 없는 정치적 정의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에서 경제로의 확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 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한 전투는 인간사에서 그 다음 정의를 위한 위대한 투쟁이 될 것이다.”
-‘경제적 민주주의를 향하여’
(사익추구와 공익이 본질적인 조화가 가능하다는 무비판적인 기업찬양과 함께 그 예로 스터빈스라는 기업가를 내세웠던 경제학자들을 비판하며. 스터빈스는 아동들에게 하루 15시간씩 노동을 시키고 졸음을 막기 위해 쇠몽둥이로 아동들을 구타하고, 그래도 졸음을 이기지 못한 아동 종업원들이 기계로 빨려들어가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만약 그가 기계 개선, 생산과정의 더 효율적인 조직화, … 등의 방식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아동 학대, (부패한 정치를 통한) 보호관세, 발명가의 특허 강탈, 거짓 광고, 백여가지에 달한다고 하는 거래상 속임수를 통해 재산을 모았다면 … 그의 사익은 일반 대중의 이익과 상충하게 된다. 사기업이 지속되려면 이윤을 창출하되 대중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창출하도록 최대한 강제할 수 있는 법률이 반드시 필요하다.”
-'훌륭한 사업가 스터빈스씨의 사례'
80년 전의 그의 사유의 작은 조각들이다. 단지 새롭거나 날카로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석구석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고, 옳지 못한 것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를 한다는 점이 그의 또 하나의 장점이 아닐까.
지금 우리 사회가 80년전
그의 사유에 비해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부끄러울 따름이다.
붙임: 이책의 역자이자 러셀의 글들을 많이 번역해 소개해 주었던 송은경씨가 이 책의 번역
이후 유명을 달리 하셨다고 한다.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붙임: 이책의 역자이자 러셀의 글들을 많이 번역해 소개해 주었던 송은경씨가 이 책의 번역
이후 유명을 달리 하셨다고 한다.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