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8일 금요일

체게바라 티셔츠와 김수영 봉투




2000년대 초반이었던가.

레드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한국 땅에서 붉은 색 책 한 권이 제대로 히트 친 시절이었다.

바로 체게바라 평전.

별로 크지 않은 한국 출판계에서 남다른 인기를 누리며

꽤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논쟁이 하나 있었으니,

왠만한 서구 미남배우 뺨치는 체게바라의 훈훈한 외모를 프린트로 박아넣은

티셔츠에 대한 논쟁이었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항해온 체의 삶을 안다면, 어떻게 싸구려 티셔츠에 그의 얼굴을

박아넣어 대량유통되는 만행을 감내하느냐는게다.

체의 삶을 존경한다면, 어떻게 그의 이미지를 상품화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지금도 엇비슷하지만) 당시에도 역시 미진한 나의 공부로는 확실한 의견을 내기 어려웠지만,

체 게바라의 얼굴이 하나의 상품으로 떠도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렇다고 체 게바라를 상품으로 소비한 자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던 어린 저능아는 어느날 술을 머리 꼭대기까지 마시고 와 누웠고,

아침에 발견한건 머리맡에 두었던 붉은 책이 토사물범벅이 된 광경이었다.

체 게바라의 치열한 삶은 내 위장에서 뿜어나온 위액과 소화되다 만 고갈비로 뒤덮였다.






강남역에 대형 서적유통사의 중고 오프라인 서점이 생겼다는걸 뒤늦게 알았다.

마침 참 오랫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왕 가는 김에 약속시간보다 앞서 나가 책 구경이나 하려던 차에,

중고서점이란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 구미가 당기는 소식이 있어 적잖이 기대가 되었다.


그 서점의 중고서점으로서의 세일즈 포인트는 적절하게도

싼 가격과 많은 물량.

중고서적이 가격이 싼거야 당연한 일이고, 서점 입구에 '오늘 들어온 책 x권' 하는 식으로

붙여놓는 마케팅이 기특했다.

물론 내 망상 안에선 최신간이며 이젠 못구하는 절판된 명저에 아무튼 보물같은 책이

여기 저기에 싼 가격을 뽐내며 꽂혀있는 광경이었건만,

그러 횡재가 있을 리 있나.


그래도 그런대로 30년간 벼른 책 몇권을 집어드는 정도의 운은 있었다.

(30년간 벼른 이유는 책이 희귀해서가 아니라 내가 게을러서였지만)

철로 된 바구니에 책 5권을 우겨넣고 차례를 기다려 계산을 하려니,

의외로 친절한 계산원이 큰 봉투에 책을 넣어준다.


봉투에 새겨진 얼굴은 김수영.

반갑기도 지겹기도 한,

오른 손으로 볼을 괴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을 응시하는,

남자지만서도 그 모습에 반해서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은

그 김수영의 모습이 일러스트로 그려진 봉투다.








순간 물욕이 솟아 봉투를 하나 더 청해 받았다.

그리고 그봉투를 들고 나오며 10년 전 체게바라가 생각났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쓴웃음 나는 단면일까?

그래 그 김수영이 겨우 중고서점 포장지로 화해 재림했단 말인가?


이걸 꼭 비판적으로, 래디컬하게 보는것은 아니다.

단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참에 비닐봉투에 볼을 괸 김수영을 보며

불현듯 10년 전 어딘가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렀던 체 게바라의 티셔츠가 생각났을 뿐이다.


2013년을 사는 한반도의 젊은이로써

눕지도, 가래를 뱉지도, 불가능한 꿈을 품지도 못하겠는 부끄러움이야 여일하련만.


나는 하나 더 얻어온 김수영의 껍데기를 그려놓은 봉투를

책장 맨 윗칸에, 얼마전까지 전직 군 통수권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문구가 놓였던 자리에

장식해놓았다.



지금 그가 준엄한 자세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관심 없다는 눈빛으로

내 키보드를 쏘아본다.


나는 이 봉투에 무엇을 빚졌으며 무엇이 맘에 안드는겐가.

체의 티셔츠는 과연 얼마나 잘못이며 얼마나 불경한겐가.


야동을 재생하는 날은 그의 얼굴을 반대편으로 뒤집어 놓아야겠다.

그 곳에 꽂힌 책은 도킨스의 불경한 책들이다.

시인은 도킨스와 어떤 얘기를 주고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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