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0일 수요일

어둠의 왼손- 현실을 비추는 허구








서지 정보
제목
어둠이 왼손
저자/역자
어슐러 르 귄/ 서정록
출판사
시공사
출간일
2002.09.09
페이지
384p
판형
148*210
가격
9,500





SF라는 장르

한국에서 sf는 소위 말하는 장르 문학중에서도 인기가 없는 편에 속한다. 일부 매니아들은 열광하지만 대부분의 독자가 손사래를 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sf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편이다. 첫만남은 과학독후감대회라는 명목으로 국민학교 때 강매 당한, 만듦새가 조잡한 책이었고 이후로도 필립k딕의 몇몇 단편선을 읽은 게 전부다. 코니 윌리스의 소설을 읽으며 차오르는 이유 모를 짜증을 참다 못하고 던져버린 이후로 sf는 손을 떼었다. 만일 Sf로 분류할 수 있다면 커트 보네거트와 더글라스 아담스정도가 추가될 수 있을까.

커트 보네거트는 스스로가 sf작가로 규정되는데 대한 유머 섞인 푸념을 늘어놓은 일이 있다. 본인은 진지한 작가로 인식되고 인정받고 싶은데 sf작가라는 분류가 일종의 낙인이 된다는 소리다. (덕분에 sf팬들에게 푸짐한 원망을 들었다고 한다.) 이 일화로 미루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sf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은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어둠의 왼손>의 백미는 서문이다. 그녀는 서문을 통해 sf에 대한 선입견과 sf 스스로가 굳어가려는 어떤 경향성에 대해 경계한다. 그녀는 sf작가는 예언자나 과학자가 아니라 그저 현재 세계를 기술하고, 허구를 통해 그를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파멸과 같은 멸망적인 극단으로 치달아 미래를 예언하는듯한 sf, 그리고 이로 인해 sf가 일종의 미래 예언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비판한다. 소설가의 임무는 예언이 아니라 허구와 거짓말이며, 소설가는 현재를 기술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은유로서의 허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양성 또는 무성, 게센인

이 소설은 헤인 세계관 연작 중의 일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지구를 포함한 여러 별들이 동맹을 맺고 은하간 여행이 가능해진 시대의 이야기이다. 헤인 인들의 행성간 동맹인 에큐멘의 사절인 엔보이(사신) ‘겐리 아이겨울 별 게센에 파견된다. 헤인 인들은 은하의 새로운 별을 발견하면 미리 조사대를 파견하여 그곳의 환경과 생활상, 문화들을 파악하고, 이후 사신을 보내 평화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엔보이가 파견된 게센은 겨울별로 매우 추운 환경이고, 두 강대국인 카르하이드와 오르고린은 각각 왕정제와 평의회 과두제 국가이다. 이곳의 문화나 관습들은 소설중에 자연스럽게 묘사되며5개의 챕터를 할애하여 민담이나 조사보고서를 통해 더 심도 있게 보여준다. 추운 지방이라는 특성에서 나온 여러 생활상들이 있고, 그들의 독특한 문화인 시프그레서가 존재한다. 시프그레서는 위신, 체면, 지위, 자존심..등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원칙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양성인이라는 점이다.

날 때부터 성이 구분된 지구의 인간과 다르게 그들은 무성인 채로 태어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발정기인 케머기에는 남성 또는 여성 어느 한 쪽의 성이 발현되어 육체적인 변성이 되고, 그 파트너는 그에 반응하여 반대쪽 성이 발현되어 짝짓기를 하는 것이다. 케머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무성으로 돌아오며, 여성의 역할이었던 쪽은 임신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성적인 특질이 게센인의 많은 면들에 영향을 미치며 작중에서도 이에 대한 감상이나 묘사에 많은 부분이 할애된다.

르귄이 보여주는 이 양성 사회는 곧바로 우리 인류 자신의 사회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성적 긴장이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을까? 우리에겐 너무 당연히 느껴지는 어떤 것들이 생각 해보면 단성인의 특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양성사회는 기본적으로 단성사회보다 성적인 금기가 적은 사회이며 경쟁이 적은 사회이다. 분규나 소규모 전투는 있어도 대규모 전쟁이라는 것은 없다. 물론 르귄은 양성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신분제도, 독재, 음모, 정치적인 모략과 파벌이 있다. 다만 르귄은 그녀가 고안한 이 양성세계라는 상상게임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사회를 다시 돌아보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추방자 에스트라벤

주인공인 엔보이는 동맹을 위한 사절로 게센에 온 이방인이며,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중심인물인 에스트라벤(세렘)은 속한 곳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인물이다. 외부로부터 온 타자와, 외부로 쫓겨나 타자가 되는 자. 세렘은 엔보이의 조력자이지만 엔보이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렘은 모함으로 인해 카르하이드에서 추방 당해 오르고린으로 도망치고, 엔보이 역시 카르하이드가 동맹을 받아들이지 않자 오르고린으로 향한다. 하지만 오르고린의 정치적 상황은 엔보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고, 엔보이는 수용소에 갇히고 만다.

먼 우주에서 왔다는 빛의 사신 엔보이는 완전히 미덥지는 않지만 게센의 정세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키르하이드에서 그는 정권을 잡으려는 섭정에 밀려나고, 오르고린에서는 그를 이용하여 권세를 잡으려는 세력이 있지만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오르고린으로 추방된 세렘은 수용소에 있는 엔보이를 구해 함께 도망친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북 쪽, 눈과 얼음의 세계를 통해 그를 다시 카르하이드로 데려다주려는 것이다. 이 긴 여행을 통해 둘은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된다. 갖은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세렘은 게센과 헤인의 동맹을 성립시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세렘은 숭고한 희생을 택했고, 그로 인해 게센은 동맹을 선택하게 된다. 작품의 시작부분에는 게센의 의식이 나오는데, 다리()아치 건설시, 그 쐐기석 틈새에 모르타르를 칠하는 풍습이다. 이는 양안을 잘 연결하라는 의미에서 사람 희생양의 피와 뼈를 넣던 의식이 변형 된 것이다. 결국 세렘은 게센과 헤인간의 다리 가운데 놓이는 제물을 택한 것이다.

중간에 삽입되는 눈보라 속에서반역자 에스트라벤은 세렘의 삶과 닮아있는 이야기이다. 세렘은 형제간의 케머에 대한 규약을 어겨 가족 영지에서 추방 당하고, 반역의 오명을 쓰고 본국에서도 추방 당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 추구하는 것은 사랑과 이웃과의 (오르고린/헤센) 평화였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키르하이드와 폐하를 위해 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제가 봉사하는 주인을 위해 일했습니다. “

아르가벤 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주인이란 에큐멘을 말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인류입니다.”...



빛은 어둠의 왼손

제목 어둠의 왼손은 빛을 가리킨다. 르귀은 동양 사상에 관심이 많은걸로 보이는데, 작중에 계속 등장하는 것은 서구사회적 이분법과 대비되는 동양적인 음양의 이미지이다.

게센인들의 성 자체가 이분되지 않으며, 그로 인해 그들의 사상과 문화가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연인처럼
함께 누워있다.
마주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결국 르귄이 상상으로 만든 이 세계는 양성이라는 특질에 의해 이분법적인 사고와 반대되는 조화와 음양의 세계이다. 양면성과 조화, 타자간의 만남과 이해, 이 책을 읽은 후에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상상게임이 될 것이다.

2013년 3월 26일 화요일

<바보들의 결탁>, 한 바탕 난장극.








서지 정보
제목
바보들의 결탁
저자/역자
존 케네디 툴/ 김선형
출판사
도마뱀 출판사
출간일
2010.12.27
페이지
560p
판형
A5, 148*210
가격
14,800






미국 문학사상 최고의 괴짜, 이그네이셔스

작품의 무대가 된 뉴올리언스의
D.H 홈즈 백화점 앞에는 그를 그리는 동상이  있다.


엄청난 거구에 터질듯한 뱃살, 너저분하게 기른 수염과 푹 눌러 쓴 더러운 초록색 사냥 모자. 그가 원하는 이상향은 중세의 절대왕정제이고, 그리스신화의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가 돌리는 수레바퀴의 방향이 자신의 실제 인생과 운을 좌우한다고 믿는다. 좋아하는 책은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나이 서른이 넘어 백수인 그는 홀어머니 집에 얹혀 살며 하는 일이라곤 방에 틀어박혀 노트에 글을 끼적거리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의 글과 연구들이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디에서도 인정은 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불러온 현대의 온갖 타락상과 천박함(작품의 배경은 1960년대)을 통렬하게 공박하나, 헐벗은 10대 소녀들이 온갖 쇼를 벌이는 어린이 프로그램과 헐리우드의 미녀스타가 나오는 경박한 영화는 욕을 퍼붓기 위해 반드시 챙겨 본다. 그런 주제에 성을 혐오해 동정이다. 대학시절엔 여자친구도 있었지만 연인이자 원수인 머나 민코프와는 플라토닉한 관계였고, 둘은 사랑보다도 함께 작당을 해 무능력한 교수를 비난 하거나 작당을 해 학내 운동을 하는데 더 열심이었다. 타락한 현대의 물질문명 이외에 가장 그를 괴롭히는 것은 시시 때때로 꽉 닫혀버리는 유문이다. 마음의 안정을 잃었을 때 주로 나타나는 유문의 닫힘 현상은 결국 늘 거한 트림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대충 뭉뚱그린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J. 라일리의 모습이다. 진땀 나도록 괴상하고 한숨 나오는, ‘진상이 존댓말로 온갖 허황된 궤변을 소설 내내 늘어놓는다. 이 정도면 가히 소설에 남을만한 괴짜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얽히고 꼬이는

소설은 뉴올리언스의 D.H 백화점 앞에서 시작한다. 류트 줄을 사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이그네이셔스의 괴상한 차림새를 본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 하고, 곧 구경하던 군중과 경찰, 이그네이셔스와 그의 어머니가 뒤엉킨 촌극이 벌어진다. 경찰이 자신을 빨갱이라고 비난한 군중 속의 노인을 체포하는 동안 도망친 이그네이셔스 모자는 <기쁨의 밤>이라는 술집으로 몸을 숨기고, 이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다. 술을 마신 어머니는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 보상금을 물어내야 하고, 그를 위해 이제까지 빈둥거리던 이그네이셔스를 일자리를 얻으라고 내몰고, 이그네이셔스가 리바이 팬츠사 에 일자리를 얻고….

스토리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만 그 안에서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얽히고 꼬이는 데서 오는 재미가 기막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를 통해 인물들의 아귀가 맞물릴 때는 일종의 쾌감이 느껴질 정도다. 잠깐의 언급으로 스쳐 지나갔던 인물이 후에 재등장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리바이사장 이라든가, 맨큐소 순경을 치근덕거린다고 쥐어 팬 레즈비언 세 사람, 어머니의 모자를 산 남색가 도리안 그린 등.. 처음엔 별 역할이 없는 엑스트라 같던 인물들이 후반에 등장해 꼬여가는 이야기를 더 꼬아놓으며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이그네이셔스, 그의 모친, 순경과 그의 이모, 달린, 술집 여주인과 강제로 일하는 흑인, 리바이 팬츠의 직원들과 사장부부 등적지 않은 등장인물이 각자의 욕망이나 목표를 가지고 행동하며, 그것이 이그네이셔스의 등장과 함께 조금씩 일그러진다. 누군가는 그를 이용하여 사보타주를 계획하고, 누군가는 그와 관계되지 않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그를 동정하고이그네이셔스 역시 마찬가지로 그만의 목표와 기획이 있고, 소설 내내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 하지만 결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독특한 캐릭터와 유머 넘치는 표현들 등 많은 장점 중에서도 이 소설의 가장 뛰어난 점을 꼽으라면 이런 스토리 전개를 짚고 싶다. 요약이 힘든 촌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건과 인물들이 얽혀 들어가는데, 이것은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


보에티우스와 운명의 수레바퀴

작중 이그네이셔스가 아끼는 책이자 대단원의 사건을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이란 책이다. 이그네이셔스가 툭하면 읊어대는 여신 포르투나의 수레바퀴도 이 책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다.

보에티우스는 로마시대의 철학자로, 정치적인 사정으로 투옥되어 고문 받다가 숨졌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쓴 책이 철학의 위안인데, 이 책에서 보에티우스는 현실이 불공정할지라도 최고선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 고유의 본성을 간직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작가가 철학의 위안을 불러온 것은 왜일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 할 수 있다.

첫 째, 상황을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함이다. 중세를 꿈꾸는 머저리 이그네이셔스가 아낄만한 책으로 적당하며, 전라의 포르노사진 모델이 얼굴을 가릴 때의 극적 효과가 더해지고, 그 사진을 보고 흥분해 가여운 그녀를 찾아나서는 대목 역시 그럴 것이다.
둘 째, <철학의 위안>을 통해 작가가 무언가를 더 말하고자 함일 수 있다. 자본주의와 인종차별, 매카시즘 등 당시 시대의 광풍 속에서, 요구되는 것은 최고선을 부단히 지향하는 자세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그 재미 진 스토리 전개와 독특하고 웃긴 인간군상들이 매력이지만, 왠지 그 재미와 유머의 한 꺼풀 아래에 작가가 절실히 하고 싶은 얘기가 묻혀 있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단지 웃기기 위해, 그냥 바보 같은 인물들을 보여주며 비꼬는 데서 끝나는 소설이 아니라는 느낌이다. 보에티우스는 웃음을 부르는 장치인 동시에 작가의 의중을 대변하는 장치인 것이 아닐까?


존 케네디 툴, 방년 서른둘.

작가인 존 케네디 툴은 서른 둘의 나이로 자살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의 처녀작이자 유작이다. 책은 그의 사후 11년만에 출판되었다. 이 소설이라며 성공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매달렸지만 완성된 원고는 출판사마다 거절당했고, 어머니와의 관계도 소원해지자 우울증에 걸린 작가는 자결했고, 사후 그의 원고를 본 어머니가 11년간 출판사를 돌며 아들의 원고를 읽어보기라도 해 달라고 부탁한 끝에 겨우 출판된 것이다. 그리고 출판된 다음해인 1981년 퓰리쳐상을 수상하며 그 진가를 인정받는다.

이건 슬프고도 안타까운 이야기이며, 뭔가를 해보려는 젊은이들, 특히 문청들에게는 굉장히 답답해지는 이야기이다. 사후에라도 빛을 보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러한 작가에 얽힌 이야기 덕분에, 주인공이그네이셔스에게는 작가가 보는 자신의 모습이 적잖이 투영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보통의 경우 주인공에 작가의 모습을 겹쳐 읽는 것은 오독의 여지가 많겠지만, 이 소설의 경우는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을까.

바보들의 결탁은 주인공이 세상의 뒷통수를 후려치려 달려들다 결국 가운뎃 손가락을 세우고 꽁무니를 빼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도주에서 <캐치-22>요사리안의 도주가 떠올랐다. 요사리안의 도주가 자유라면 이그네이셔스의 도주는 다음엔 뉴욕에서 분탕질을 쳐야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결코 주인공의 결단과 행동에 의해 전개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주변인물들의 기획과 목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런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홀로 자기만의 벨탄샤웅(세계관)’에 둘러 쌓여 비현실적인 기획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주인공이 허황된 의도로 행동하는 결과는 주변 인물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영향을 끼친다. 이 이야기의 주변인물 중 행복해지는 것은 흑인 존스와 달린, 맨큐소 순경과 리바이 사장이고, 술집 여주인 리와 남색가 그린, 레즈비언들, 리바이 부인은 불행해진다. 전자 그룹은 남에게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는(또는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고, 후자 그룹은 남을 억압하거나 무시하고, 부당하게 영향력을 미치려 하는 사람들이다. 작가가 서서히 전개하며 보여주는 꼬이고 꼬여가는 이야기들은 크게 보아 세 축으로 나뉜다. 이그네이셔스의 기획, <기쁨의 밤> 여주인의 기획, 그리고 리바이팬츠의 기획. (리바이 바지회사는 필연적으로 리바이스 청바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작가가 실제 리바이스를 노리고 쓴건지, 아니면 단순히 유대인을 연상시키기 위한 장치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그네이셔스의 기획은 이야기 내내 비중은 높고, 중요성은 낫다. 온통 그의 허황된 망상으로 점철된 일지들, 실없는 궤변 같은 주장, 비현실적인 목표들. 그의 행동을 추동하는 가장 큰 요인은 전 연인이자 지금은 원수나 다름 없는 머나 민코프와의 경쟁이다. 어머니의 사고로 인한 배상금을 갚는 것이 최초의 지상과제였으나, 그는 사실 그를 위한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지상목표는,지금은 뉴욕으로 건너가 새로운 방식의 사회운동을 한다며 잘난 체 하는 머나의 콧대를 꺾어놓기 위해 더 원대한 혁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실제로 사회 변혁을 위한 혁명이 아니므로 어떤 이상적인 면도 없다. 그는 단지 개인적인 동기로 허황된 기획들을 세우고, 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반대편의 머나도 상황은 비슷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때마다 편지를 보내 이그네이셔스의 속을 긁어놓지만 결국 관심 있어하던 남자는 그녀를 따먹고 나면소식이 없다.

아마도 스포일러가 될 두 번째 기획은 <기쁨의 밤>여주인 레이나 리의 기획이다. 사실 소설 내내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결과를 드러낼 때 가장 놀랍고도 웃긴 부분도 이 기획의 몫이다. <기쁨의 밤>의 주요 구성원은 주인 레이나 리, 스트리퍼 달린, 청소부 존스, 셋이다. 리는 <기쁨의 밤>의 여제로 군림하는데, 심지어 손님을 대할 때도 그렇다. 달린은 약간 모자라지만 연민이 많은 아가씨이고, 현재는 손님접대를 하며 물 탄 술을 팔기를 강요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스트리퍼로서 무대 위에서 쇼를 하는 것이 꿈이다. 존스는 소설을 통틀어 가장 유쾌하고도 영리한 인물인데, 흑인이라는 이유로 직업이 없으면 부랑죄로 잡아간다는 경찰의 협박에 못 이겨 <기쁨의 밤>에서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 시급에 청소부로 고용된 인물이다.

소설의 큰 줄거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레이나 리의 기획과, 이를 망가뜨려 이 곳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를 얻으려는 존스의 사보타주 기획의 대립이다. 레이나와 불량학생 조지간의 거래를 수상히 여긴 존스는 틈을 보아 종이뭉치에 <기쁨의 밤> 주소를 남기고, 이후 달린의 스트립쇼 오프닝쇼를 사보타주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한다. 여러 우연이 겹치며 이그네이셔스가 <기쁨의 밤>에 나타나고, 결국 존스의 기획은 멋지게 성공한다.

리바이팬츠의 구성원은 사장 부부와 직원 두 명,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이다. 리바이팬츠의 사장 거스 리바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바지사업에 관심이 없는 정도를 넘어서 골칫거리로 여기기에 될 수 있는 한 리바이팬츠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집에서도 편히 있을 수 없는데, 아내인 리바이부인과 서로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리바이 부인은 그 어떤 것보다도 두 딸에게 아비인 거스 리바이의 흉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심지어 어떤 파멸이 오더라도 그 파멸 자체보다는 두 딸에게 아비 흉을 볼 생각에 기쁨을 느낀다. 그녀는 부르주아적인 취미로 심리학을 공부하며 엉터리 실험을 통해 이론을 입증하려 한다.

관리자인 곤잘레스는 매일 새벽에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자신의 인생을 회사에 바치고 늘 자리에 붙어 일을 하는 데서 인생의 기쁨을 찾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역할이다. 미스 트릭시는 여든이 넘어 가는 귀가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파인데, 그녀는 심리학 이론을 입증하기 위한 리바이부인의 엉터리 실험의 몰모트가 된다. 미스 트릭시는 은퇴를 간절히 바라지만 리바이 부인은 회사에 평생 헌신해온 트릭시를 해고하는 것은 몰인정하다고 주장하며 그녀의 은퇴를 허락지 않는 것이다. (물론 트릭시에게 이것은 고문이다.)

리바이 팬츠에는 이그네이셔스의 등장과 함께 위기가 찾아온다. 그는 사보타주를 획책했고, 실패로 끝나며 쫓겨나지만 그가 재임중 한 어떤 일 때문에 더 큰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갖은 오해가 겹쳐 사건이 꼬이고, 바로 사건이 꼬인덕분에 모든 일이 잘 해결된다. 그리고 리바이 사장은 지금까지 싫어해오던 회사를 자기 식대로 제대로 바꾸려는 기획을 구상하게 된다. (그 외에도 맨큐소 순경, 도리안 그린 등이 이그네이셔스에 휘말린다. )

모든 사건 전개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이그네이셔스지만, 이는 결코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이그네이셔스는 자신만의 허황된 공상에 빠져 쓸모 없고 엉뚱한 일들을 벌이지만 주변 인물들은 결코 그가 의도치 않은 결과에 맞닥뜨린다.


누가 '바보'인가.

바보들의 결탁이라는 제목은 진정한 천재가 등장했음은 바보들이 단결해서 그에 맞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라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럼 과연 누가 천재고 누가 바보일까? 작중에서 한 명의 천재를 꼽자면 흑인 존스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등장인물 중 그만이 자유라는 가치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기획을 밀어붙이고, 스스로의 노력의 결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해낸다. 하지만 그럴 경우 천재와 바보의 구도가 약간 어그러진다. 존스의 대립항은 경찰들과 레이나 정도이기에. 모든 등장인물과 대립하는 것, 결탁한 세력들과 맞서는 것은 분명 이그네이셔스이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조차 바타글리아 부인의 권유에 넘어가 그를 자선병원에 유폐시키려 한다.

그러나 분명 작중에서 이그네이셔스는 세상의 바보들이 결탁하여 맞서려는 천재는 아니다. 다만 그의 엉뚱한 공상과 어리석은 기획이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불러올 뿐이다. 분명 작중의 이그네이셔스는 정떨어지는 면들에도 불구하고 절대 미워할 수는 없는 캐릭터이지만 작가가 그의 기행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렸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말하는 바보들의 결탁이란 바로 이그네이셔스 자신이 생각하는 벨탄샤웅(세계관)임이 드러난다.

이그네이셔스는 스스로가 언제든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될만한 작품을 남길 수 있다고 믿으며 방에 틀어박혀 닥터너트를 마시고, 닫힌 유문 사이로 트림이나 해대며 노트를 궤변으로 가득 채운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어떤 이상적인 빛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의 비판과 독설은 단지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퍼부어질 뿐이며, 그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사회에 대해 그가 제대로 이해하고 숙고한 흔적은 없다. (그의 우상인 보에티우스는 그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중세 왕정제 하에 억울하게 고문으로 죽었다.)

작가의 이그네이셔스에 대한 묘사에는 분명 양가적인 면이 담겨있다. 일면 미워할 수 없는 자신만만한 돌아이이며 그에게 연민을 느낄 때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의 어리석음과 한심함에 대한 냉소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그네이셔스는 매우 복합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그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단독자 같기도 하지만 그의 의도와 행동은 사실 그 때 그 때 되는대로 스스로의 만족을 추구할 뿐이다. 타락상을 욕하면서도 그 여배우의 영화는 극장에 가서 챙겨 볼 때 그의 준거 없음이 드러나고, 머나에 대한 반감에 의해 추동 되는 기획들에서 그의 얕은 세계관이 드러난다.

이그네이셔스의 상황이 작가 자신의 현실과 적잖이 겹쳐있는 것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작가는 자조적이고 자아비판적인 면을 이그네이셔스에 투영시킨 것이 아닐까? 집에 틀어박혀, 현실세계와 대면하지 않고, 스스로가 언젠가는 잘 될 거라는 허황된 꿈을 끄며, 노트를 끼적이고, 어머니에게 얹혀살며… (현대의 히키코모리와 어떤 면에서 유사하다.)

작가 스스로의 투영이든 아니든, 작가가 보여주는 이그네이셔스의 모습은 분명 허황된 환상에 빠져 현실과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이다. 그가 벌이는 일들은 꼬이고 꼬여 여러 변화들을 이끌어내지만, 그건 우연의 결과일 뿐 그가 이루어 낸일이 아니다. 제목인 바보들의 결탁은 결국 작가의 목소리가 아닌 이그네이셔스의 망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천재이자 이 사회에 맞서는 혁명가로 상정하고 타락한 시대상의 바보들이 결탁하여 자신을 핍박한다고 여기지만, 현실은 아무도 결탁하지 않았고, 그에 맞서지도 않는다. 분명 그는 세상에 나와 세상에 맞서 뭔가를 하지만, 거기에 어떤 긍정적인 함의가 있지는 않다. 

 스스로에게 고난을 설정하고 자신의 영웅신화를 쓰려는 바보가 필연적으로 망상속에서 창조해낼 수 밖에 없는 가상의 장애물이자 주적들, 그 환상을 요약한 단어가 바로 바보들의 결탁인 것이다. (이그네이셔스를 현대의 돈 끼호테라고 볼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판사는 아마도 존스와 미스터 왓슨일 게다.)

물론 작가가 이그네이셔스의 허황됨을 낱낱이 비판하려 이 작품을 쓴 것은 아닐게다. 언급했듯이 작가는 한 편으로 이그네이셔스를 조롱하면서도 한 편으로 연민을 보낸다. 시시때때로 닫히는 유문은 그의 탓이 아니며, 비뚤어진 성격의 시발점은 죽은 개에 대한 사랑이었다. 허황된 의도이긴 하나 그는 분명 세상에 맞서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다. 자선병원에 잡혀갈 위기에서 머나 민코프가 처음으로 실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를 구해 뉴욕으로 탈주하는 데서 작가가 작은 희망을 심어 놓은 것을 발견한다. 뉴욕으로 간 이그네이셔스는 아마도 새로운 바보짓을 벌이겠지만, 적어도 머나는 급박한 현실의 탈출구가 되어준다. 어쩌면 작가에겐 바로 이런 희망이 필요했던게 아닐까.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런던통신 1931-1935>, 빛 바래지 않는 사유들.








서지 정보
제목
런던통신 1931-1935
저자/역자
버틀란드 러셀 / 송은경
출판사
사회평론
출간일
2011.4.21
페이지
557p
판형
A5, 148*210
가격
14,800







철학자의 사유

런던통신 20세기를 대표하는 양심적 지식인, 버트란드 러셀이 약 5년간 신문지상에 연재한 짧은 글들을 묶은 책이다. 1931년부터 1935,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난 후, 이 기간동안 러셀은 신문 지상에 연재하는 글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 대한 통찰을 통해 독자의 사유를 자극한다. ‘서양 철학사로 유명한 러셀이기도 하지만, 그를 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의 글들 전체를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그의 글들은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르게 보기, 다르게 생각하기의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실천이다. 쉽게 넘겨버릴 수 있는 전통이나 인습, 믿음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며 통념을 외부로부터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 전투적이고 공격적이란 뜻은 아니다. 신문을 읽는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글이니만큼 쉽고도 명확한 언어와 번뜩이는 재치, 위트가 가미된 반어법으로 이루어진 글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전투적인 외침이 아니라 읽으면서 감탄하고 공감하고 미소 짓게 하는 사유의 결과물들이다. 철학자의 사유면서도 난해하지 않고, 통념을 공격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그 지점이 바로 이 노장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 아닐까.


칼럼의 본연

5년간의 연재기간 동안 그는 인간의 삶, 감정, 정치, 윤리, 의식, 국제정세, 문명, 사회제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귀족가문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종교, 폭력, 전제정치, 제국주의, 전쟁, 남성우월주의, 미신, 독재, 노예제도, 핵무기, 천민 자본주의 등 기득권과 기존의 갖은 선입견에 대해 대항해 온 그의 삶의 기본적인 태도가 글 여기저기에 녹아 들어 있다.

근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아일랜드의 농촌이나 중국 등에도 체류한 그의 이력도 한 몫 하는데, 문명과 비문명을 비교하는 사유에서는 전자가 드러나고, 중국 체류 경험은 당시 서구에서도 흔치 않았던 동양에 대한 지식이 엿보인다. 중국의 노자 등 도교에 대한 언급, 주지육림 설화에 대한 언급이 보이고,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의 한국인 학살이나 한국(조선)궁궐에서 신하가 임금 앞에서 언제나 몸을 떨어야 했다는 등의 언급이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러셀은 이렇듯 자신의 다양한 체험과 사유를 이용해 짧지만 실한 칼럼들을 많이 남겼다. 사실 대부분의 칼럼이 두 장 내외의 짧은 글들인데, 500쪽이 넘는 책이 이렇게 짧은 호흡으로 계속되다 보니 앉은 자리에서 죽 읽기가 좋은 편은 아니다. 게다가 쉬운 언어로 쓰여진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곱씹어볼 부분이 많아서 결코 단시간에 독파를 추천할만한 책이 아니다. 아마도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하루에 너댓편 정도씩 꾸준히 읽는 편이 좋지 않을까. 반납기일이 걸려서 허겁지겁 읽어 치우고 나니 떠오른 아쉬움이다.


세상은 변했지만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쓰인 글들이라면, 대충 평균을 계산해보면 10년만 더 있으면 100년을 묵힌 셈이 된다. 1차대전 이후, 대공황과 뉴딜의 시대, 우리 선조들은 일제 강점기 아래 있었던 그 시대. 그럼에도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러셀의 사유들은 낡은 생각들이 아니라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사유들이며, 지금 봐도 새롭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급진적이기까지 하다. 러셀의 사유의 기준점이 그 시대 자체나 스스로의 이해관계였다면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문학작품의 경우 후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하더라도 문학성을 인정받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지만, 100년 후에도 빛이 바래지 않는 칼럼이란 것은 저자의 사유가 시간을 관통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게다.

예를 들면, 인간 본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급 들이다.

사실 낙관주의는 신뢰 할만 한 때에는  유쾌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엄청 짜증스럽다. 특히 짜증스러운 것은 우리와 곤경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자들이 우리의 곤경에 대해 낙관주의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다.” 
–‘낙관주의에 대하여

세계사에는 네 종류의 시대가 있었다. 모두가 자기는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대, 아무도 자기가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대, 현명한 사람들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시대, 어리석은 사람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시대. …첫 번째는 안정의 시대, 두 번째는 서서히 쇠퇴하는 시대, 세 번째는 진보의 시대, 네 번째는 재앙의 시대다. (이후 러셀은 이를 차례대로 원시시대, 기독교 이전의 고대시대, 18~19세기, 그리고 러셀 자신이 살고 있던 당시로 소개한다.)
 -'바보들만 똑똑한 시대'

요즘 사회에서 논의되는 일들에 대한 참고도 얻을 수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파리 한 마리도 해치지 못할 정도로 유순하고 온화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 이에 대해선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파리를 향한 자비심이 인간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 ‘채식주의자도 사납다
 학창시절에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이다.  … 이런 감정은 도덕적 분개로 정당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 자신은 결코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는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고픈 욕구에 불과하다.”
–‘체벌의 악영향
속담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주로 상상의 산물이다. 대체로 속담은 상반된 내용을 가진 것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 200년 전에는 라틴어로 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진실로 여겼다. 셰익스피어의 구절을 인용해도 그와 비슷한 힘을 갖게 된다.”
–‘속담은 어디에서 왔을까?’

두 개의 민주주의

500쪽 넘게 가득 들어찬 러셀의 날카로운 사유들 사이에서도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통찰이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2012 대선용 급조기획 취급이나 받는 경제민주주의를 1930년대의 러셀이 강력히 주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 러셀은 초기 자본주의의 야만적 모습과 미국의 대공황, 귀족을 대체해 가던 부르주아들을 보며 민주주의에 대해 숙고하게 되지 않았을까

러셀은 일단 민주주의는 훌륭한 제도임을 인정하나, 그 불완전성을 인정치 않고 무조건적인 찬양을 한다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약점을 수정할 수 없게 되어 위험해 진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약점은 정치적으로 보면 다수의 폭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토크빌적인 견해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경제적인 민주주의가 수반되지 않는 정치적 민주주의는 반쪽 짜리일 뿐이라는 것이다한 발 더 나아가, 정치적 민주주의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까지 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복수의 칼럼을 통해 드러난다.


민주주의가 필요한 까닭은 인간 본성에 담긴 충동의 힘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바람직한 까닭은 평범한 유권자가 무슨 정치적 지혜를 많이 지녀서가 아니다. 인류의 어떤 집단이든 일단 권력을 획득하면, 나머지 집단을 삶의 좋은 것들을 누리지 않고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을 입증할 목적으로 각종 이론을 창안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행의 십자가만 짊어지게 되리니


(러셀은 먼저 17~18세기 영국 귀족이 임금생활자들을 극빈상태로 몰아가는 법률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그러한 귀족의 삶을 기록한 그레빌이라는 사람의 일지를 인용한다. 일지에는 귀족부인과 그 딸이 빈민들을 방문하여 시찰하고 자비롭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찬양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편리하게도 불과 18개월 전에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않는다. 소작농들이 얼마나 기뻤던지폭동을 일으키고 볏짚더미를 불태우는 바람에 몇 사람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종신 유배형을 선고 받았던 사건 말이다. …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자선의 가능성조차 없을 것이다.” 

–‘자선이 사라진 사회

예외적인 특권에 의지하는 보장은 불공정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불공정을 변명할 핑계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은 왜곡된 도덕관념을 지닐 수 밖에 없다. … 운 좋은 소수만을 위한 보장제도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보장제도가 있어야 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현재와 같은 경쟁체제가 존속하는 한 불가능 할 것이다.” 

– ‘무정한 부자들


민주주의의 즐거움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데 있지,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양보하는데 있지 않다. …사람들은 경제 민주주의와 교육 민주주의가 수반되지 않는 정치 민주주의는 엉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주주의의 위험성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론 나름대로 중요하다. 과도한 억압을 방지하여 경제력의 평등한 분배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마 경제적 정의가 없는 정치적 정의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에서 경제로의 확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 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한 전투는 인간사에서 그 다음 정의를 위한 위대한 투쟁이 될 것이다.” 

-‘경제적 민주주의를 향하여


(사익추구와 공익이 본질적인 조화가 가능하다는 무비판적인 기업찬양과 함께 그 예로 스터빈스라는 기업가를 내세웠던 경제학자들을 비판하며. 스터빈스는 아동들에게 하루 15시간씩 노동을 시키고 졸음을 막기 위해 쇠몽둥이로 아동들을 구타하고, 그래도 졸음을 이기지 못한 아동 종업원들이 기계로 빨려들어가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만약 그가 기계 개선, 생산과정의 더 효율적인 조직화, … 등의 방식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아동 학대, (부패한 정치를 통한) 보호관세, 발명가의 특허 강탈, 거짓 광고, 백여가지에 달한다고 하는 거래상 속임수를 통해 재산을 모았다면 그의 사익은 일반 대중의 이익과 상충하게 된다. 사기업이 지속되려면 이윤을 창출하되 대중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창출하도록 최대한 강제할 수 있는 법률이 반드시 필요하다.”

-'훌륭한 사업가 스터빈스씨의 사례'


80년 전의 그의 사유의 작은 조각들이다.  단지 새롭거나 날카로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석구석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고, 옳지 못한 것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를 한다는 점이 그의 또 하나의 장점이 아닐까.

지금 우리 사회가 80년전 그의 사유에 비해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부끄러울 따름이다.


붙임: 이책의 역자이자 러셀의 글들을 많이 번역해 소개해 주었던 송은경씨가 이 책의 번
         이후 유명을 달리 하셨다고 한다.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2013년 3월 8일 금요일

체게바라 티셔츠와 김수영 봉투




2000년대 초반이었던가.

레드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한국 땅에서 붉은 색 책 한 권이 제대로 히트 친 시절이었다.

바로 체게바라 평전.

별로 크지 않은 한국 출판계에서 남다른 인기를 누리며

꽤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논쟁이 하나 있었으니,

왠만한 서구 미남배우 뺨치는 체게바라의 훈훈한 외모를 프린트로 박아넣은

티셔츠에 대한 논쟁이었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항해온 체의 삶을 안다면, 어떻게 싸구려 티셔츠에 그의 얼굴을

박아넣어 대량유통되는 만행을 감내하느냐는게다.

체의 삶을 존경한다면, 어떻게 그의 이미지를 상품화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지금도 엇비슷하지만) 당시에도 역시 미진한 나의 공부로는 확실한 의견을 내기 어려웠지만,

체 게바라의 얼굴이 하나의 상품으로 떠도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렇다고 체 게바라를 상품으로 소비한 자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던 어린 저능아는 어느날 술을 머리 꼭대기까지 마시고 와 누웠고,

아침에 발견한건 머리맡에 두었던 붉은 책이 토사물범벅이 된 광경이었다.

체 게바라의 치열한 삶은 내 위장에서 뿜어나온 위액과 소화되다 만 고갈비로 뒤덮였다.






강남역에 대형 서적유통사의 중고 오프라인 서점이 생겼다는걸 뒤늦게 알았다.

마침 참 오랫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왕 가는 김에 약속시간보다 앞서 나가 책 구경이나 하려던 차에,

중고서점이란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 구미가 당기는 소식이 있어 적잖이 기대가 되었다.


그 서점의 중고서점으로서의 세일즈 포인트는 적절하게도

싼 가격과 많은 물량.

중고서적이 가격이 싼거야 당연한 일이고, 서점 입구에 '오늘 들어온 책 x권' 하는 식으로

붙여놓는 마케팅이 기특했다.

물론 내 망상 안에선 최신간이며 이젠 못구하는 절판된 명저에 아무튼 보물같은 책이

여기 저기에 싼 가격을 뽐내며 꽂혀있는 광경이었건만,

그러 횡재가 있을 리 있나.


그래도 그런대로 30년간 벼른 책 몇권을 집어드는 정도의 운은 있었다.

(30년간 벼른 이유는 책이 희귀해서가 아니라 내가 게을러서였지만)

철로 된 바구니에 책 5권을 우겨넣고 차례를 기다려 계산을 하려니,

의외로 친절한 계산원이 큰 봉투에 책을 넣어준다.


봉투에 새겨진 얼굴은 김수영.

반갑기도 지겹기도 한,

오른 손으로 볼을 괴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을 응시하는,

남자지만서도 그 모습에 반해서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은

그 김수영의 모습이 일러스트로 그려진 봉투다.








순간 물욕이 솟아 봉투를 하나 더 청해 받았다.

그리고 그봉투를 들고 나오며 10년 전 체게바라가 생각났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쓴웃음 나는 단면일까?

그래 그 김수영이 겨우 중고서점 포장지로 화해 재림했단 말인가?


이걸 꼭 비판적으로, 래디컬하게 보는것은 아니다.

단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참에 비닐봉투에 볼을 괸 김수영을 보며

불현듯 10년 전 어딘가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렀던 체 게바라의 티셔츠가 생각났을 뿐이다.


2013년을 사는 한반도의 젊은이로써

눕지도, 가래를 뱉지도, 불가능한 꿈을 품지도 못하겠는 부끄러움이야 여일하련만.


나는 하나 더 얻어온 김수영의 껍데기를 그려놓은 봉투를

책장 맨 윗칸에, 얼마전까지 전직 군 통수권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문구가 놓였던 자리에

장식해놓았다.



지금 그가 준엄한 자세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관심 없다는 눈빛으로

내 키보드를 쏘아본다.


나는 이 봉투에 무엇을 빚졌으며 무엇이 맘에 안드는겐가.

체의 티셔츠는 과연 얼마나 잘못이며 얼마나 불경한겐가.


야동을 재생하는 날은 그의 얼굴을 반대편으로 뒤집어 놓아야겠다.

그 곳에 꽂힌 책은 도킨스의 불경한 책들이다.

시인은 도킨스와 어떤 얘기를 주고 받을까.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사랑하자 좆밥들아.


서지 정보
제목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저자/역자
박민규
출판사
예담
출간일
2009..7.20
페이지
420p
판형
A5, 148*210mm
가격
12,800


*본문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책을 아직 안 읽은분은 주의*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아이돌과, 발라드 가수가 출연하는 무대를 보고 있는데카레를 먹으며 보고 있는데방청객들의 박수소리도 여전한데한결같은 MC에 늘 보던 무대인데어떤 예고도 없었는데느닷없이 요들송을 부르는 아저씨가 나와  
요로레이요 레이리요 레이요르리 
하는 기분이었다. ,뭐야카레가 식을 때까지 망연자실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첫 만남이다. ‘가 백화점 주차관리 아르바이트를 시작 한 날 발견한 그녀세기를 대표하는엄청난 추녀였다. 박민규는 이 소설에서 누가 봐도 충격을 받을 만큼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을 다룬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기를, 꿈같던 신혼시절 아내가 내가 만일 굉장히 못생겼더라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추한 외모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근원적 질문인 동시에 유치해질 수도 있는 질문일 터이다 .특히 이것을 주요 제재로 소설을 풀어나가려 한다면 굉장히 막막할 듯 하다. (나 자신을 포함한) 주위 현실을 둘러볼 때, 외모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어떠한가? 입으로는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은 많이 하지만 분명히 외모의 미추美醜는 모두가 지니고 들이대는 잣대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엄청나게 못생긴 여인이 겪는 아픔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접근하는 남자는 게임에서 진 벌로 벌칙을 수행하는 자일 뿐이고, 늘 그 뒤에 킥킥대는 무리가 있다.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못생긴 여자는 일종의 계급적 차별을 겪는다. 감수성 예민한 추녀에게 이 세상은 상처만 줄 뿐이다. 못생긴 여자는 남자같이 쾌활하거나 스스로를 망가뜨려 웃음을 주는 재담꾼이 아닌 다음에야 늘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받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책 표지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라는 그림인데, 몇 명의 소녀들 사이에 놀랄 만큼 못 생긴 추녀가 서있다. (주인공과 사랑하는 사이인 다소곳한 여주인공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청초한 미녀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책을 읽는 도중 수시로 이 표지의 추녀에게서 도움을 얻었는데, 그만큼 나도 외모 판타지에 경도되어 있다는 뜻일 게다. ) 이 표지는 원본 그림을 수정하여 추녀만 밝게 처리하고 나머지 부분을 조금 어둡게 해놓았는데, 전체적으로 이 책의 소재를 훌륭하게 보여주는 표지이다. 예쁜, 또는 보통인 여자들 사이에 선 추녀.


그와 그녀와 요한

 ‘는 슈퍼스타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특출 나게 잘생긴 미남으로, 배우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려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만 정작 가계에 보탬은 안 되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보잘것없는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집안을 먹여 살리며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스타로 가는 길을 잡고 유명해진 아버지는 결국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 ‘가 미추에 초연한 채 그녀를 사랑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마도 이런 가정환경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는 왠지 모르게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그녀가 마음에 걸렸고, 그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자로부터의 호의에 익숙지 않은 그녀가 마음을 여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게 둘은 가까워진다. ('그'와 '그녀'는 작중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두 인물의 사이에 있는 인물은 요한인데, 어떻게 보면 요한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열아홉의 재수생 신분인 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녀가 연결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요한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거의 요한의 입을 빌어 발화된다. 자유분방한 생활방식, 숨기고 있는 어두운 부분, 입만 열면 나오는 신랄하면서도 통쾌한 대사 등, 요한은 작가의 페르소나이자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 있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는 훼이크다 좆밥들아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그 특출난 구성인데, 요약하자면 액자 속의 액자 구성이다. ‘는 흥신소에 그녀의 행방을 의뢰해 그녀를 찾으며 소설을 통해 둘의 과거 이야기를 추억하고, 소설의 절정에서 왜 그가 그녀와 헤어져 그녀를 찾아야 했는지가 밝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애틋한 둘의 해피엔딩으로 소설이 끝난다. 그리고 또 한번의 반전이 나오는데, 정말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이다. 앞의 모든 텍스트가 사실 요한이 쓴 소설이며, ‘는 사고로 인해 죽었던 것이다요한은 현재 자신의 아내가 된 그녀를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작가는 마지막에 요한, ‘그녀’, ‘버전의 세 결말을 담는데, 사실 이것은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요한과 그녀의 부분이 같은 내용이고 의 부분만 소설 내용이므로, 사실은 요한이 쓴 소설이라 보인다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이후에 가장 충격을 받은 반전이었는데, (물론 이것은 내가 작품을 읽은 순서 때문이다.) 앞의 텍스트가 모두 부정되면서 충격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점에서 비슷하다. 개인적으로는 이후 스토리와의 유기적 연결과 그 반전이 작중 스토리 내에서 가지는 의미, 그리고 감동이 배가된다는 점에서 박민규의 그것이 더 맘에 든다. 소설의 형식상의 새로운 시도나 실험들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소설은 신선한 형식적 시도를 선보이면서도 그 시도의 효과가 시도나 실험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 내부에 흡수되어 서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성공적인 시도이다.

 소설의 구성 외에도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일단 이 소설의 단락 구성인데, 소설 거의 전체가 평균 10줄 내외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문장 사이 자주 ‘…’가 등장하고, 때로 문장이 진행 중인데도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책 첫머리에서 도대체 왜 이 두 남녀가 이러는지 어리둥절한데 이상한 단락으로 눈이 오고 나무가 서있고 풍경묘사를 해대는데 답답하고 짜증이 날 수도 있는데, 책을 읽어나갈수록 점점 그 거슬림이 잊혀질 것이다. 화자의 내면과 사건 전개, 대화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면서, 마치 1980년대 재수생이 된듯한 몰입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신기한 점은, 분명 80년대를 배경으로 80년대만의 풍경들이 잔뜩 등장하고 시대적 고증에 충실한데도, 과거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소재는 추녀, 주제는 사랑.

 이 소설은 사실 추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추녀를 통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돼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사랑이다. 왜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비웃고 짓밟으며,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게는 질투와 동경을 동시에 보내는가. 추한 외모에 보내는 경멸은 능력 없는 사람, 돈 없는 사람에게 보내는 무시와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상대평가의 긴 잣대를 만들어 모든 것에 있어 사람을 줄 세우고 평가한다. 모든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경쟁논리에 따라 우리는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동경하는 것이다.

 요한의 입을 빌어 작가는 말한다진짜 특출 난 사람도, 진짜 못난 사람도, 1%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평범한, ‘좆밥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들에게 뭐든 선택하고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좆밥들이 끝없이 부러워하고 끝없이 일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부러워하기 시작하면 부끄러워하게 된다. 자기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1%를 보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 부끄러워한다. 열등감은 좆밥들의 특권이다.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다.’ 이 사회를 망치는건 독재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해주는 그 좆밥들이다. 잘 살게 해주겠다고, 집 값을 올려주겠다고 하는 소리에, 상위 1%를 동경하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표를 던진다결국 이 사회를 둘러싼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야말로 이 난장의 시작이자 끝인 것이다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란 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사랑이란 연대와도 바꾸어 쓸 수 있는 말로 보이는데, 99%좆밥들끼리, 더 이상 서로를 부끄러워하고 1%를 부러워할게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자는 것이다. 우연히도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은 게 대선 이후였는데, 그래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라는 작가의 진단이 더욱 예리하게 다가왔다. 예언서인가요 이거..

 책을 좋아한다면서 박민규를 처음 읽은 것은 변명 할 수 없는 내 게으름의 증명일 게다. 이 소설을 통해 그의 명성이 허명이 아닌 것을 알았다. 이 소설을 구성과 형식, 내용, 소재와 주제의식 등 많은 면에서 훌륭하며, 특히 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소설의 내적인 완성도를 제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내공이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머릿 속에 맴돌던 많은 생각들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라는 한 마디로 깔끔히 정리해주는 작가의 외침이 좋았다. 그리고 그냥 감성적인 러브스토리로 봐도 손색 없는 소설이지만, 아무래도 이 사회를 관통하는 박민규의 예리함을 지나칠 독자는 없지 않을까. 아무튼 개인적으로 (출간일과 상관 없이) 올해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딱 맞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