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사랑하자 좆밥들아.


서지 정보
제목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저자/역자
박민규
출판사
예담
출간일
2009..7.20
페이지
420p
판형
A5, 148*210mm
가격
12,800


*본문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책을 아직 안 읽은분은 주의*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아이돌과, 발라드 가수가 출연하는 무대를 보고 있는데카레를 먹으며 보고 있는데방청객들의 박수소리도 여전한데한결같은 MC에 늘 보던 무대인데어떤 예고도 없었는데느닷없이 요들송을 부르는 아저씨가 나와  
요로레이요 레이리요 레이요르리 
하는 기분이었다. ,뭐야카레가 식을 때까지 망연자실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첫 만남이다. ‘가 백화점 주차관리 아르바이트를 시작 한 날 발견한 그녀세기를 대표하는엄청난 추녀였다. 박민규는 이 소설에서 누가 봐도 충격을 받을 만큼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을 다룬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기를, 꿈같던 신혼시절 아내가 내가 만일 굉장히 못생겼더라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추한 외모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근원적 질문인 동시에 유치해질 수도 있는 질문일 터이다 .특히 이것을 주요 제재로 소설을 풀어나가려 한다면 굉장히 막막할 듯 하다. (나 자신을 포함한) 주위 현실을 둘러볼 때, 외모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어떠한가? 입으로는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은 많이 하지만 분명히 외모의 미추美醜는 모두가 지니고 들이대는 잣대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엄청나게 못생긴 여인이 겪는 아픔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접근하는 남자는 게임에서 진 벌로 벌칙을 수행하는 자일 뿐이고, 늘 그 뒤에 킥킥대는 무리가 있다.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못생긴 여자는 일종의 계급적 차별을 겪는다. 감수성 예민한 추녀에게 이 세상은 상처만 줄 뿐이다. 못생긴 여자는 남자같이 쾌활하거나 스스로를 망가뜨려 웃음을 주는 재담꾼이 아닌 다음에야 늘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받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책 표지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라는 그림인데, 몇 명의 소녀들 사이에 놀랄 만큼 못 생긴 추녀가 서있다. (주인공과 사랑하는 사이인 다소곳한 여주인공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청초한 미녀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책을 읽는 도중 수시로 이 표지의 추녀에게서 도움을 얻었는데, 그만큼 나도 외모 판타지에 경도되어 있다는 뜻일 게다. ) 이 표지는 원본 그림을 수정하여 추녀만 밝게 처리하고 나머지 부분을 조금 어둡게 해놓았는데, 전체적으로 이 책의 소재를 훌륭하게 보여주는 표지이다. 예쁜, 또는 보통인 여자들 사이에 선 추녀.


그와 그녀와 요한

 ‘는 슈퍼스타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특출 나게 잘생긴 미남으로, 배우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려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만 정작 가계에 보탬은 안 되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보잘것없는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집안을 먹여 살리며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스타로 가는 길을 잡고 유명해진 아버지는 결국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 ‘가 미추에 초연한 채 그녀를 사랑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마도 이런 가정환경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는 왠지 모르게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그녀가 마음에 걸렸고, 그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자로부터의 호의에 익숙지 않은 그녀가 마음을 여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게 둘은 가까워진다. ('그'와 '그녀'는 작중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두 인물의 사이에 있는 인물은 요한인데, 어떻게 보면 요한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열아홉의 재수생 신분인 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녀가 연결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요한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거의 요한의 입을 빌어 발화된다. 자유분방한 생활방식, 숨기고 있는 어두운 부분, 입만 열면 나오는 신랄하면서도 통쾌한 대사 등, 요한은 작가의 페르소나이자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 있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는 훼이크다 좆밥들아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그 특출난 구성인데, 요약하자면 액자 속의 액자 구성이다. ‘는 흥신소에 그녀의 행방을 의뢰해 그녀를 찾으며 소설을 통해 둘의 과거 이야기를 추억하고, 소설의 절정에서 왜 그가 그녀와 헤어져 그녀를 찾아야 했는지가 밝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애틋한 둘의 해피엔딩으로 소설이 끝난다. 그리고 또 한번의 반전이 나오는데, 정말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이다. 앞의 모든 텍스트가 사실 요한이 쓴 소설이며, ‘는 사고로 인해 죽었던 것이다요한은 현재 자신의 아내가 된 그녀를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작가는 마지막에 요한, ‘그녀’, ‘버전의 세 결말을 담는데, 사실 이것은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요한과 그녀의 부분이 같은 내용이고 의 부분만 소설 내용이므로, 사실은 요한이 쓴 소설이라 보인다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이후에 가장 충격을 받은 반전이었는데, (물론 이것은 내가 작품을 읽은 순서 때문이다.) 앞의 텍스트가 모두 부정되면서 충격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점에서 비슷하다. 개인적으로는 이후 스토리와의 유기적 연결과 그 반전이 작중 스토리 내에서 가지는 의미, 그리고 감동이 배가된다는 점에서 박민규의 그것이 더 맘에 든다. 소설의 형식상의 새로운 시도나 실험들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소설은 신선한 형식적 시도를 선보이면서도 그 시도의 효과가 시도나 실험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 내부에 흡수되어 서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성공적인 시도이다.

 소설의 구성 외에도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일단 이 소설의 단락 구성인데, 소설 거의 전체가 평균 10줄 내외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문장 사이 자주 ‘…’가 등장하고, 때로 문장이 진행 중인데도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책 첫머리에서 도대체 왜 이 두 남녀가 이러는지 어리둥절한데 이상한 단락으로 눈이 오고 나무가 서있고 풍경묘사를 해대는데 답답하고 짜증이 날 수도 있는데, 책을 읽어나갈수록 점점 그 거슬림이 잊혀질 것이다. 화자의 내면과 사건 전개, 대화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면서, 마치 1980년대 재수생이 된듯한 몰입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신기한 점은, 분명 80년대를 배경으로 80년대만의 풍경들이 잔뜩 등장하고 시대적 고증에 충실한데도, 과거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소재는 추녀, 주제는 사랑.

 이 소설은 사실 추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추녀를 통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돼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사랑이다. 왜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비웃고 짓밟으며,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게는 질투와 동경을 동시에 보내는가. 추한 외모에 보내는 경멸은 능력 없는 사람, 돈 없는 사람에게 보내는 무시와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상대평가의 긴 잣대를 만들어 모든 것에 있어 사람을 줄 세우고 평가한다. 모든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경쟁논리에 따라 우리는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동경하는 것이다.

 요한의 입을 빌어 작가는 말한다진짜 특출 난 사람도, 진짜 못난 사람도, 1%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평범한, ‘좆밥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들에게 뭐든 선택하고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좆밥들이 끝없이 부러워하고 끝없이 일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부러워하기 시작하면 부끄러워하게 된다. 자기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1%를 보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 부끄러워한다. 열등감은 좆밥들의 특권이다.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다.’ 이 사회를 망치는건 독재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해주는 그 좆밥들이다. 잘 살게 해주겠다고, 집 값을 올려주겠다고 하는 소리에, 상위 1%를 동경하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표를 던진다결국 이 사회를 둘러싼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야말로 이 난장의 시작이자 끝인 것이다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란 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사랑이란 연대와도 바꾸어 쓸 수 있는 말로 보이는데, 99%좆밥들끼리, 더 이상 서로를 부끄러워하고 1%를 부러워할게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자는 것이다. 우연히도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은 게 대선 이후였는데, 그래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라는 작가의 진단이 더욱 예리하게 다가왔다. 예언서인가요 이거..

 책을 좋아한다면서 박민규를 처음 읽은 것은 변명 할 수 없는 내 게으름의 증명일 게다. 이 소설을 통해 그의 명성이 허명이 아닌 것을 알았다. 이 소설을 구성과 형식, 내용, 소재와 주제의식 등 많은 면에서 훌륭하며, 특히 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소설의 내적인 완성도를 제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내공이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머릿 속에 맴돌던 많은 생각들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라는 한 마디로 깔끔히 정리해주는 작가의 외침이 좋았다. 그리고 그냥 감성적인 러브스토리로 봐도 손색 없는 소설이지만, 아무래도 이 사회를 관통하는 박민규의 예리함을 지나칠 독자는 없지 않을까. 아무튼 개인적으로 (출간일과 상관 없이) 올해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딱 맞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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