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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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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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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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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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짜이푸 저 / 임태홍, 한순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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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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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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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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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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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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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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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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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5,
148*21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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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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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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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청진기
2008년 여름 서울광장에서 있었던 재한 중국인들의 폭력사태를 기억할 것이다. 촛불 집회는 도사견 마냥 열성적으로 때려잡더니, 몽키스패너가 날아다니는
중국인들의 노골적인 폭력 앞에선 순한 반려견 같았던 경찰의 행태가 더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 때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타국에서 집단적으로 그런 폭력을 휘두를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가장 큰 요인은 ‘대국굴기’로 대표되는 중국식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어쩌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인 류차이푸는 천안문사태
때문에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지식인이다. 중국 밖에서 중국을 진단하는 저자는 ‘쌍전’ (‘삼국지’와 ‘수호전’)이 중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스며들어 악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쌍전은 4대경전으로 꼽힐만큼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그 안에 합목적성이나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선善이 부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작품이니만큼 세월이 갈수록 널리 읽히고 무비판적으로,
습관적으로 수용되며 중국인의 기저 의식 속에 침투하였다. 이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SSANG JEON" is "종교"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중국에는 서양의 야훼 같은, 인민 일반이 믿고 의지할만한 표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교, 불교, 도교는 사실상 무신론(내지 불가지론)이며, 종교
뿐 아니라 종교의 가치이념인 ‘사랑’, ‘구원’등 의지할만한 개념도 없었다. 마오와 맑시즘은 의식적으로 수용되었으나
중국인민의 잠재의식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긴 세월 읽혀온 쌍전이야말로 중국인의 잠재의식에 뿌리를 내려
왔다. 저자는 문혁의 이념인 ‘반역은 정당하다’ 는 기치도 수호전의 영향 하에 수용된 것이라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관우가 아직도 신으로 추앙 받으며 사당까지 세워 모셔지는 것은 의지할 존재가 없던 중국인에게 의리와 우정의 상징인 관우가 믿고 의지할 존재로 잠재의식
기저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 일반에 습관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경전을 비판하고,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고, 그 가치에 의문을 표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역설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수용되어온
쌍전이 왜 해악인 것일까? 저자는 일단 쌍전을 ‘위형문화’로 분류하고, ‘원형문화’와
대비시킨다.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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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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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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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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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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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서유기
산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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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원질原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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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 아름다움, 도전정신, 동심,
인본주의, 건설적 영웅상,
여성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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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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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전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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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적, 질적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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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 영웅상, 영혼 없는
충의,
신념 없는 정서, 여성의 도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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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4대경전 중의 ‘홍루몽’과
‘서유기’는 중국의 원질이며, 아름다움과 선함을 담고 있다. 반면 쌍전은 변질된 변형물에 불과하며, 문학적 성취는 인정 하나 그 이념이나 가치는 후흑厚黑(뻔뻔하고 어두움)하다고 비판한다.
이종오의 ‘후흑학’에서 산국지의 등장인물이 평가된 부분을 인용하기도 하고, 루쉰의 입을 빌려 “중국에는 분명히 아직도 ‘삼국지’와 ‘수호전’이 성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삼국지’와 ‘수호전’의 분위기가 사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라고도 한다. 또한 ‘대지’의 S.펄벅이 수호전을 영역하며 ‘사해는 모두 형제다’라는 부제를 붙이려 했을 때 루쉰이 “양산박 사람들은 결코 모든 사람을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 일화도 인용한다. 그리고 조목조목 구체적 예를 들며 쌍전을 해부한다.
이종오의 ‘후흑학’에서 산국지의 등장인물이 평가된 부분을 인용하기도 하고, 루쉰의 입을 빌려 “중국에는 분명히 아직도 ‘삼국지’와 ‘수호전’이 성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삼국지’와 ‘수호전’의 분위기가 사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라고도 한다. 또한 ‘대지’의 S.펄벅이 수호전을 영역하며 ‘사해는 모두 형제다’라는 부제를 붙이려 했을 때 루쉰이 “양산박 사람들은 결코 모든 사람을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 일화도 인용한다. 그리고 조목조목 구체적 예를 들며 쌍전을 해부한다.
“모든 반란은
정당하다.”-수호전
수호전의 경우 저자의 비판은 수호전을 관통하는 두가지 명제에 집중된다. “반란은 정당하다”, 그리고 “욕망은
죄악이다.”라는 명제이다.
“반란은 정당하다”라는 명제는 작중에서 “모든 반란은
정당하다”로, 그리고 “반란을
위한 모든 수잔은 정당하다.”로 변용된다. 혁명이나 개혁은
분명 정당한 일이나, 그를 위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수호전은 반란은 정당하다는 기치 아래 모든 수단을 정당화시키고 찬양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루쉰의
말처럼 “혁명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수호전의 독자는 이규나 무송처럼 의미 없는 살육을 즐길수록 영웅적이라고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육식당, 임충의 살인 투명장, 무송의 원앙루사건 등이 그 예가 된다. 또한 주동, 안도전, 노준의 등을 양산박으로 가담시키기 위한 계획에선 아무 죄
없는 양민이나 영아까지 살해하여 목적을 달성하고, 또 거기에 대한 어떠한 죄책이나 비판의식도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중국의 문학비평가인 김성탄이 무송의 원앙루 살인사건에서 죽인 사람 수를 세며 감탄하고
찬양하는 부분을 인용하며 이러한 수호전에 대한 수용을 비판한다.
“욕망은 죄악”이란 명제는 여성을 도구화하는 태도가 논점이다. 수호전에서
여성은 요물 또는 기물에 불과할 뿐, 주체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
여성의 욕망은 음란함으로 규정되어 도덕적으로 심판해야 할 죄악이 된다. 특히 ‘음란함’은 가장 큰 죄로, 가장
참혹한 처벌대상이다.
반금련, 염파석, 반교운은 오장육부가 들어내지는 등 가장 참혹한 처벌을 받는다. 게다가
양산박 내에서는 여자를 멀리 할수록 영웅적이며 도덕적 우위에 서는 것으로 묘사된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정치적 측면에서 반란을 주장하면서도 도덕적 측면에서 통치자들과 일치한다.”고
꼬집는다.
권모술수의 집대성 –삼국지
삼국지에 대한 비판은 ‘권모술수’와 ‘음모’에 대한 비판이다.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이 ‘가면을 쓰고 남을 기만하는’인간들이며, 남을 잘 속이고 기만할수록 더 훌륭하게 평가받는 것을
비판한다. 저자의 평에 따르면 유비는 뻔뻔하며, 조조는 잔혹하고, 손권은 둘에는 못미치지만 두가지 면을 모두 지녔으며 사마의는 양면성을 지녔다.
또한 ‘패거리주의’원형으로 ‘도원결의’를 지목한다. 도원결의는
의형제간의 아름다운 의리가 아닌, 비합리적인 배타적 ‘이너
써클’이라는 것이다. 삼국지에서 말하는 의리는 소집단 내
성원끼리만 존재할 뿐, 외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유언과
유장 등이 그 예이다. 도원결의는 삼형제의 내부에만 통용되는 형제윤리였고, 감정원칙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는 변질된 파괴적 지혜만 강조하여 지혜의 권력화, 권모술수화를 초래했다고 저자는 본다. 정사의 제갈량은 뛰어난 정치술로
내정을 잘 다스렸으나 군사적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데 비해, 나관중은 제갈량이 기만적 군사술을
발휘하는 장면만 강조하여 지어낸다. 저자는 이를 비판하며 우리가 인식해인 할 것은 정사에서 제갈량이
보여준 치국의 건설적 지혜라고 한다.
저자는 삼국지의 이러한 해악이 반영된 예로 문혁당시 홍위병 조직의 승리비결을
든다.
‘성실성은 필요 없다.’ ‘사당死黨을 결성한다.’ ‘상대방에게 먹칠을 한다.’
진심을 가지는 성誠 없이 뻔뻔한 삼국지의 가면문화, 배타적 파당주의인 ‘도원결의’, 유비를
위해 조조를 폄훼하고 제갈량을 위해 주유를 정사와 다르게 폄훼한 나관중의 작법이 각각의 원칙에 대응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초선, 손씨부인등 여성이 도구화되어
하나의 물건처럼 등장하는데 대해 비판한다
질문 1 – 세종대왕님 중혼죄 범하셨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두개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 첫번째는 ‘과연 당대의 시대관념 하에 쓰여진 고전에 대해 현대의
시대정신에 준거해 비판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도구화는 분명 잘못되었지만, 수호전의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그것을 현대적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이 온당한가? 조선시대 백성이
왕을 모셨다고 하여 봉건주의자로 비판해야 하나? 물론 이 책 안에는 그러한 반론에 대한 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의 논조를 감안하면, 적어도 이 책의 비판은
‘그렇다. 온당하다.’ 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위에도 썼듯이, 저자의 쌍전 비판에
있어 핵심은 ‘쌍전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고, 그 가치에
의문을 표하는 것’이다. 즉 쌍전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쌍전에 내재된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쌍전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에 중점을 둔 비판, 즉 현대적
수용을 목표로 한 비판이기에 시대적 차이에 대한 의문을 비껴 간다고 본다.
질문 2 - 폭력성을 실험해보기 위해 쌍전을 읽어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책이 마주할 가장 큰 질문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책(게임, 영화, 드라마, ,TV, 미디어..)이
수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게임을 하면 폭력적이 되고, 음란동영상을
보면 강간범이 되고, TV를 보면 바보가 되는가? 이 질문은
대중문화가 탄생한 근대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왔고, 아직도 명확하게 결론 나지 않은 채 주기적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질문이다. 이 책의 입장은 쌍전이라는 책 때문에 중국의 원형문화가 변질되었고, 사회가 ‘후흑’해졌다는
것인데, 그럼 과연 그 잘못이 쌍전에 있는가?
이 질문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더욱 곤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미디어가 범죄의 원인이라고
떠드는 언론에 코웃음 치는 독자에게는. 어쨌든 저자의 말에 따르면 쌍전이 중국에서 받아들여지고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은 것은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환경 때문인데, 저자는 중국 문화의 어두운 면이 쌍전을 탄생시켰고, 또 그 쌍전이 어두운 면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글쎄, 어떤 임계점 같은 것이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모집단의 차이가 있는걸까?
이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수긍하는 입장에서, 그러면 미디어가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집단 무의식과 수용자의 범죄성 간의 차이점을 비교분석 해야
하는 걸까? 아직 답을 못 내겠다. 적어도 쌍전과 같이 ‘경전’으로 추앙받는 작품이, 습관적/무비판적으로 어떤 집단에 오랜 기간에 거쳐 수용될 때, 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만큼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결국 이런 질문의 선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책의 부제인 '어떻게 쌍전은 동양을 지배했는가?'일 것이다. 저자가 짚는 쌍전의 문제점들은 분명 온당하다. 그리고 오랜 세월 사회에서 찬양 받으며 수용되었으므로 영향력이 없을 수도 없다. 그럼 과연 중국인의 어떤 기질, 또는 저자가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아마도 펜대의 끝이 가리키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혁,홍위병,천안문 사태 등'에 대해서, 과연 그 잠재 의식속의 씨앗이 쌍전이 맞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두번째 질문에 대한 열쇠가 될 것이며 이 책만으론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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