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싱글맨>, 지나간 날들의 화석을 짊어지고.


서지 정보
제목
싱글맨
저자/역자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저/조동섭 역
출판사
그책
출간일
2009.12.05
페이지
221p
판형
B6, 128*188mm
가격
9,000



  
이 남자의 하루

 많은 훌륭한 소설이 그렇듯, ‘싱글맨도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에 대한 또는 죽음을 대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부재를 통해 존재를 이야기하고, 삶을 통해 죽음을 이야기하며 공허를 통해 사랑을, 순간을 통해 영원을 이야기 한다. 이 책이 직접 서술하는 것은 중년 교수 조지의 하루이다. 그 짧은 하루 동안 조지의 생활을 뒤쫓으며 독자는 이 남자의 삶의 궤적과 내면을 샅샅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작가의 필치는 평탄하지만 어느 순간순간의 감정이나 작은 공기의 떨림을 날카롭게 잡아낸다. 그리고 이 남자의 삶을 하루로 압축해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도 하루 하루 죽어가고 있지 않나요?’

 가장 큰 사건은 짐의 죽음이다. 그는 조지의 연인이었다. 그들은 퀴어커플이었다. 조지는 짐의 부재 속에서 고통스럽다. 그의 육신의 늙음은 새삼 자각되고, 하루 하루 침대에서 맞는 아침은 새로운 삶이 아니라 줄어든 삶과 같다. 그의 처져가는 껍데기 속에는 그가 지나온 과거의 생이 화석처럼켜켜이 쌓여간다. 짐과 팔을 부딪히던 좁은 계단참에서 그는 상실의 통증을 느낀다.

조지는 60년대의 동성애자이자, 미국에 거주하는 영국인이자, 젊음이 만발하는 캠퍼스의 늙은 교수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62년의 로스앤젤레스 근교이다. 당시 동성애자에 대한 미국사회의 태도는 당연히 지금보다 더 적대적이었을 터이다. 조지라는 인물은 여러 갈래로, 예컨대 성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방인인 것이다. 그의 삶을 지탱해주던 짐은 교통사고로 떠났다. 이 상실에 대해 ,연인을 잃은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거리를 두고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가 그의 삶의 깊은 내핵이었다. 그는 많이 고통스러운 듯 하지만 짐짓 의연하고, 무너질 듯 하면서도 신념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의 의연함이란 아침마다 육신에 옷을 걸쳐 사람들이 조지라 부르는 역할을 수행하며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웃에는 짐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이사 간 것으로 말해 두고 혼자서, 죽음이 성큼 다가온 아침마다 그의 추억을 대면하여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그의 의연함이다그의 신념은 그 의연함에서 오는데, 바로 ‘짐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다. 짐의 죽음을 여자 앞에서 눈물 흘리는 이야깃거리로 대하게 되는 것은 둘이 함께 한 삶과 짐의 죽음을 배신하는 거라고 조지는 생각한다

이방인적 정체성

그의 이런 의연함과 신념은 어디서 유래한 걸까? 아마도 그의 이방인적, 아웃사이더적 정체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기댈 곳 없는 이방인에게 있어 사랑하던 연인, 그 연인을 잃고 오는 슬픔은 누구와 나누어질 수 없다. 그 슬픔을 오롯이 감당하고, 홀로 안고 가는 것이 조지의 윤리였다. 짐의 죽음에 대해 이웃 사람들에게 입을 앙다문 샬럿을 보며 절대 짐을 배신할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은 아웃사이더의 정체성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애도였던 것이 아닐까?

수업 후 교수식당에서 만난 신시아는 젠체하는 속물 지식인의 대표로 등장한다. 미국인이면서도 유럽적 고상함을 숭배하는 그녀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조지의 이방인적인 국가적 정체성이다.
 “미국은 프래그머티즘을 확립하기 위해 효율성을 추구했고, 그들의 생활 양식은 상징적인 편의로 귀착되었다. 유럽인들이 개성과 비효율적 낭만성을 중시하며 미국을 미성숙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유럽인들이 물질주의적이며 미국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지의 발언은 매우 묘한데, 이는 유럽적 문화를 동경하는 미국인에 대한 영국출신 미국인의 답변이라는 관계에서 그렇고, 미국인이 상징적 광고세계에서 산다는 반박이 사실 미국을 두둔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비판적인 자기혐오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반박에서 읽히는 복잡한 층위들이 바로 조지의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여러 여름이 지나간 뒤 백조가 죽는다.

조지가 수업시간에 하는 열변은 이러한 조지의 아웃사이더적인 정체성을 대변해준다. 헉슬리의 여러 여름이 지난 뒤 백조가 죽는다를 주제로, 이 소설이 그리스신화의 티토누스를 모티프로 쓰였다고 하며 이 작품 안에서 소수집단에 관한 주제를 끄집어 낸다. 그리고 소수집단을 인정하는 척하는 자유주의적 사고를 비판한다. (헉슬리의 소설을 찾아보았는데 여러 여름..’은 아직 번역이 안되었고 헉슬리 평론집에 관련 평론이 실려있는 것 같다. ) 그는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여 소수집단을 인정하는 시늉을 하는 것보다는 솔직히 자기 안의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 안전장치를 만들 수 있어 낫다고 보는데,  실제로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퀴어가 부정적 의미라 하여 게이로 바뀌었다가 요새 다시 퀴어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도 이런 조지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인 듯하다.


죽은 과거들의 총합=현재

조지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도리스를 만난다. 그녀는 짐을 사랑했고, 그래서 조지의 연적이었다. 조지는 그녀를 혐오하고 싫어했으나 죽음 앞에서 쪼그라든 그녀의 육신을 보며 황망하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며 생의 기운을 느껴보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얼굴에 지난날의 죽은 화석들이 빼곡하다는 것을 안다. 육신은 결국 쪼그라들어갈 그의 가면이다. 사람들이 조지라 부르는 껍데기이다. 그는 그 육신 안에서, 자신의 생이 점점 줄어감을 안다

그는 샬럿과의 긴 대화 이후, 해변 바에서 제자 케니를 우연히 만난다. 짐을 처음 만났던 그 바에서, 케니를 만난 조지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쩌면 짐을 잊을 수 있을까? 케니와의 대화는 아슬아슬 조지를 흥분시키고 해변에서 나체수영을 한 후 케니는 조지를 따라 조지의 집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술과 대화 끝에 남은 것은 추잡한 노인네 같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조지는 추잡한 노인네인 자신을 유혹하는 케니를 질책한다. 짐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케니의 유혹을 받아 더 큰 베팅을 거는 작업인가? 조지는 케니의 여자친구와 케니의 정사를 상상하지만 그의 수음을 돕지 못한다. 결국 그의 상상에서 두 개체는 낮에 본 테니스를 치던 몸 좋은 두 청년으로 대체된다. 이것은 무얼 의미할까? 결국 조지의 사랑의 예감, 젊은 제자의 유혹, 이 모두 순간 스쳐가는 느낌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조지는 케니를 짐처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짐을 배신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읽히는 것은 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나 수절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그냥 그럴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회한이나 쓴웃음이다. 조지는 오전에 끔찍하다고 여겼던 계획, 크리스마스에 멕시코에서 일주일간 술집을 전전할 계획을 실행하기로 하고 웃는다.

소설은 마지막에 결국 인간은 언젠가 어떤 이유로든 죽으며, 그 후에 육신이라 불리는 껍데기는 쓰레기나 다름 없다고 끝 맺는다. 조지는 죽었을까? 동맥이 막혔을까? 아니면 다음날 아침에도 일어나 자기의 볼품없는 육신을 보고, 짐을 떠올리고, 거울에서 하루 더 지난 지금을 보며 어제의 화석이 하나 더 쌓인걸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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